약속 | 송선미
오늘은 11주년 결혼기념일이다. 우리가 벌써 12년째 함께 살고 있다. 연애 기간이 1년 조금 넘었으니 인연을 맺은 지는 13년 차다. 첫 만남에서 나에게 쉴 새 없이 얘기하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 데자뷔를 느꼈다. 그래서 '나 이 남자랑 결혼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리는 정말 결혼했고, 자기 직전까지도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아이와 셋이 살고 있다.
나랑 결혼해 줘서 고마워
아직 우리가, 결혼기념일날 아침에 나랑 결혼해 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는 사이인 게 감사하다.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시간이 쌓여서 '동지애'가 생기고 서로의 '진짜 보호자'로 거듭나고 있어서 감사하다. 11년을 살아도 미운 정 고운 정이 이 만큼이나 쌓이는데 20년, 30년, 40년... 그 이상을 함께 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태어난 날이 누군가 죽은 날일 수 있고 어떤 부부의 결혼기념일이 어떤 부부의 사별일 일 수 있는 게 삶이라는 걸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모든 것이 피어나는 이 봄에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는 게 슬프다.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자꾸 생겨서인지 생각이 거기까지 가버렸다. 우리 중 한 사람이 먼저 떠나도 결혼기념일은 안 없어질 텐데. 남편에게 나보다 먼저 죽지 말라는 말을 하게 되는 11주년 결혼기념일이 될 줄이야.
결혼기념일에 송선미 시인의 동시 『약속』을 다시 읽으니 또 다르게 읽힌다. "꽃길만 걷게 해 줄게요"가 아니라 "꽃이 지는 순간에도요"에 마음이 간다. 꽃길만 걸을 수 없는 인생에서 꽃이 지는 순간에도 당신과 꽃길을 걷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우리가 결혼하며 약속한 것이 아니었을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해서인지 보라색을 가장 좋아했던 여자와 주황색을 가장 좋아할 정도로 자존감이 높았던 남자가 만나서 노오란 달처럼 웃는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있다. 보라색을 좋아했던 여자는 최근 몇 년 전부터 초록색을 좋아하게 되었고 마침내 주황색도 사랑하게 되었다. 자기 돌봄을 하게 되면서 평온한 마음이 어떤 건지 알게 되었고 자존감도 전보다는 생겼다.
결혼 후에 내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나를 다시 키웠다. 아들을 키우며 시어머니도, 시어머니 아들인 남편도 점점 더 이해하게 되었다.
되돌아보니, 나를 딸처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 결혼한 덕분이다. 꽃이 질 때도 그리고 다시 꽃이 필 때까지도 함께하고 싶은 고마운 사람이다.
ON 문장: (당신과요.) 꽃이 지는 순간에도요.
OWN 문장: 꽃이 지고 다시 꽃이 피는 걸 볼 때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