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을 찾아서] 청진동장터순대국
처음 순대국이 나왔을 때 깜짝 놀랐다. 뽀얀 국물에 엄청난 양의 고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고기가 많았던지, 곧바로 밥을 말면 금방이라도 국물이 넘칠 것 같을 정도였다. 그래서 푹 삶은 고기를 몇 점 먼저 집어먹으니 비계 부위가 아님에도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이미 여기서부터 나는 이 순대국이 내 취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대기, 파, 고추 등 취향껏 이런저런 재료들을 넣어 본격적으로 먹어준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광화문 순대국집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단연 '화목순대국'일 것이다. 나도 몇 번 가 봤고, 갈 때마다 만족했다. 하지만 맘 편히 자주 갈 만한 곳은 아니었는데 점심이든 저녁이든 만석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곳에서 '혼밥'을 하는 손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가게에서 저녁 시간대에 혼밥을 막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혼밥할 만한 분위기는 아닌 게 맞다.
하지만 광화문 인근에는 화목순대국 외에도 괜찮은 순대국집이 많다. 그 중 한 곳은 내가 광화문에 있는 회사를 다녔던 시절 자주 갔던 곳이다. 종로구청과 KT 광화문사옥 인근에 있는 가게, 청진동장터순대국이다. 주로 회사에 일이 있어서 가는 날 저녁 약속이 없을 때, 혼자 가곤 하던 가게다. 그리고 이곳은 늘 엄청난 양과 그에 뒤지지 않는 맛으로 내게 진한 위로를 해 줬다.
예전부터 나는 일이 힘들 때 유달리 당기는 음식이 몇 개 있었다. 지난번에 포스팅했듯 매운 음식도 즐겼지만, 또 한 가지 즐겨 먹던 게 바로 고기가 많이 들어간 순대국밥이다. 다른 어떤 음식보다도 그게 먹고 싶은 날이 있다. 그야말로 "야! 비싼 걸 왜 먹냐? 뜨끈한 국밥 든든하게 먹고 말지!"다. 여기에 소주를 곁들여 주면 금상첨화다. 그런 상황에서 만일 순대국이 입에 안 맞으면 그날 하루가 완전히 망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여기저기 새로운 식당에 도전해 보는 스타일인데, 순대국밥만큼은 검증된(?) 곳 위주로 갔다. 괜히 새로운 곳을 갔다가 입에 안 맞으면 실망할까 봐... 이곳은 그 검증된 곳 중 하나다.
이곳의 순대국밥은 몇 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 우선 순대보다는 잔뜩 쌓인 고기가 부각된다는 점이다. 순대도 넉넉하게 들었지만 고기가 워낙 많다 보니 그렇다. 일반 순대국(1만원)과 특 순대국(1만2000원)을 파는데 특 사이즈는 고기를 먼저 몇 개 먹어두지 않으면 밥을 말기가 어려울 정도다. 진하게 우러난 고깃국물에 비계가 적당히 붙은 삶은 돼지고기가 잔뜩 들었으니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순대국밥과 함께 각종 양념장이 담긴 스테인리스 용기들이 놓인다. 새우젓과 다대기, 다진 마늘과 송송 썬 청양고추다. 테이블 앞에는 들깨가루와 다진 파도 놓여 있다. 소스용 된장도 함께 나온다(경상도에서 순대를 찍어먹는 막장과는 좀 다르다). 이런저런 양념장이 매우 많은데 취향껏 양념장을 넣어 본격적으로 먹으면 된다. 그야말로 순대국밥을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것이다.
각자마다 취향이 있겠지만 나는 파를 좋아해서 파를 많이 넣고, 고추도 살짝 넣는다. 그리고 국물이 빨갛게 우러날 만큼 넉넉하게 다대기를 넣고 다진 마늘도 충분히 가미한다. 순대국의 기본인 들깻가루도 추가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넣으면 칼칼하면서도 파와 마늘 덕분에 너무 느끼하지 않은 순대국이 완성된다. 물론 매운 걸 잘 못 먹으면 다대기를 좀 덜 넣고 대신 새우젓 등을 넣어 먹을 수도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말아먹는다. 적당히 매콤한 국물이 밥알에 충분히 스며들면 여기에 고기 한두 점을 숟가락 위에 얹어 후후 불며 한 번에 먹는다. 자칫 잘못하면 입천장이 델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걸 입에 넣는 순간의 만족감만큼은 어디에도 쉽게 비할 수 없다. 고기를 많이 넣어서 그런지 고깃국물도 진하고, 그래서 국물만 먹어도 진한 육향이 느껴진다.
순대 역시 맛있다. 약간의 당면과 함께 고기와 야채가 고루 버무려진 순대소가 순대의 맛을 더욱 끌어올린다. 여기에 국물이 흥건히 젖어 더욱 맛이 풍부해진다. 당면만 든 순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순대국 체인점에서 으레 보이는 공장 납품 당면순대는 골라내고 안 먹기도 할 정도인데, 여기 순대는 맛있는 순대의 정석인 것 같다. 그냥 순대국밥을 시켜도 순대가 적잖게 들어 있고, 주문할 때 순대만 넣어 달라고 할 수도 있어 충분히 순대의 맛도 볼 수 있다.
전 회사가 광화문에 있어 이곳을 참 자주 갔었다. 일을 하다가 답답한 상황도 많았고, 선배들과의 소통 과정에서도 머리가 아픈 일들이 더러 있었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내가 하는 일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점점 강해져 어느 순간에는 회사에 가기조차 싫은 순간에 이르렀다. 그런 날 으레 이곳을 찾아 특 순대국밥을 시키고, 소주로 속을 적셨다. 그렇게 한 병을 비우고 나면 그래도 회사를 나선 직후보다는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 채로 집에 갔다. 내일 벌어질 일에 대한 답답함과 막막함이 가시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위안이었다.
지금은 전직을 하면서 하는 일도 전과는 달라졌고, 회사 위치도 광화문에서 강남 쪽으로 바뀌었다. 전만큼 이곳을 자주 오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회사 근처에 이런 식당이 있다는 게 개인적으로는 참 다행이었던 것 같다. 어쩌다 보니 늘 이곳에 혼자 왔었는데, 다음에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기분 좋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여 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서로가 순대국밥을 어떻게 다르게 만들어 먹나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