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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May 01. 2021

그 밤의 책갈피

책갈피 없이 책을 읽던 사람에 대한 기억



낮에는 집을 고치고 또 저녁에는 맥주를 마시며 쉬는, 어떻게 보면 단조로운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가끔 읍에 나가 도서관을 가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구립도서관을 종종 찾았고, 집에서 먼 시립 도서관에도 책을 읽으러 다녔었지만 그것이 그렇게 특별한 이벤트는 아니었다. 지하철 네 정거장이면 없는 책이 없는 대형서점에서 관심도 없는 세계문학 책장을 기웃거리며 마음껏 지성인인 척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난 책을 많이 읽지도 않는다. 편식은 하지 않지만 책은 아주 가려 읽는 고약한 습관이 있다.


시골에 온 뒤 나의 책 읽는 버릇과 취향은 여전했으나 길고 긴 겨울을 보내며 나는 어쩐지 책이 좀 아쉬워졌다. 그간 잦은 이사를 하면서 짐을 가볍게 하려고 1순위로 버려졌던 건  책이었는데 이제는 그 책들까지 생각이 난다. 이곳까지 짊어지고 온 책들은 서른 권이 채 되지 않았고 그 안의 문장들은 아직 내가 좋아하긴 하지만 이제 조금 익숙해져 버린, 오래된 글들이었기에 나는 조금 새롭고 설레는 단어들의 조합이 읽고 싶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먹으면 인터넷 문고에서 제목이나 표지만 보고 책을 골라 담아 기분을 낼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돈만 버리는 일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30분 정도 차를 타고 나간 읍에는 아주 작은 열람실이 있는 군립도서관이 있다. 내가 찾는 책이 거의 없지만 꾸준히 신간이 들어오는, 동시에 함께 열람하는 이가 2명을 넘지 않는 그런 조용한 도서관.



'뭐야. 너무 좋잖아?'



도서 대출증을 만들자 정말 비로소 이 지역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평소 책을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이제 와서 책이 아쉬워지다니. 게다가 막, 막 많이 읽고 싶어져! 동네 주민도 네 명밖에 모르면서 완전히 이 지역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까지! ‘가성비 끝내주잖아?’ (심지어 돈이 들지 않았으니, 가성비랄 것도 없는 것.)



-



12월의 어느 날엔 김영하 님의 <여행의 이유>를 빌려 읽다가 책에 꽂혀 있는 누군가의 밴쿠버행 비행기 티켓을 발견했다. 책을 읽다 문득 손에 잡혀 책갈피로 썼는지, 아니면 언젠가 남들 모르게 도서관에서 자신의 추억을 찾아보려 남겨둔 것인지 모를 티켓. 나는 책을 읽는 동안 그 티켓을 책갈피로 썼고 그렇게 책을 덮어둘 때마다 티켓을 꽂아 둔 이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는 왜 밴쿠버로 갔을까.’ ‘티켓을 넣어둔 걸 보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모양이지?’와 같은 상상을 했다. 장르는 물론 멜로로 빠지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다시 보러 올 때를 위해 그 티켓을 그대로 고이 넣어 도서를 반납했다.





한 때 내 옆에는 책갈피 없이 책을 읽는 사람이 있었다. 때론 펼친 채 그대로 책을 뒤집어 두기도 하고, 아주 덮어 버린 책에서도 기막히게 읽던 자리를 찾아가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읽던 부분을 읽고 또 읽으면서 책갈피를 쓰지 않는다는 요상한 부심(?)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책갈피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 그런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신기해했다.


어느 밤, 역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다가 덮어두려 책갈피를 찾는데 그날따라 책갈피로 쓸 만한 것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누군가 책 속에 끼워둔 티켓 같은 것도 없기에 대충 머리끈을 풀어서 책 사이에 꽂아두다 문득, 그 사람 생각이 난 것이다. 나는 갑자기 작정하고 몰려드는 생각들을 쫓아내지 못한 채 씩씩대었다.


이 당혹스러운 연상 작용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 한 번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추억 속으로 끄집어 내린다. 그 추억이란 마치 깨져버린 컵의 조각과도 같아서 어떤 날은 아주 작고 날카롭고 또 어떤 날은 크고 둥글다. 그 밤의 책갈피에 따라온 조각은 작고 뭉툭해 다행이었지만 생각이 났다는 자체 만으로도 스스로에게 성질이 났던 것이다. 깨진 컵을 치우는 일은 아주 성가시고 가끔은 상처도 내며, 다 치웠는가 싶다가도 어느 날 발바닥에 박혀 다시 등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이유로도 결코 밴쿠버행 티켓 같은 것 따위는 꽂아두지 않을 것이라 마음먹는다. 추억을 책갈피로 삼아 꽂아두는 그런 일은 어쩐지 미련스럽게 느껴지니까.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가 않다.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컵을 깨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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