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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Sep 25. 2021

사라지는 것일까 선명해지는 것일까

늙는다는 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져 가고 있을까. 어찌나 자연스럽게 잊히고 있을까. 아니면 혹시 조금씩 더 선명해지는 것일까.





늙어간다는 것, 그것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래 지켜본 것은 처음이다. 어린이에게 가장 처음 마주할 늙은 사람은 아무래도 할머니, 할아버지겠으나 나는 양가 조부모님과 교류가 거의 없거나,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마저도 기회가 없었다. 세상이 아주 좁았던 어린 나의 시선에는 정년퇴임을 앞둔 50대 선생님이, 앞집 사는 예순을 갓 지난 아주머니가 ‘늙음’의 표본이었다. 자라서, 도시에 살게 되면서는 연세 있으신 분들을 가까이에서 뵙게 될 기회가 더욱 없었다. 그땐 또래와 어울리기에도 젊음이 한참 모자랄 참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매일 집 앞과 논둑, 농협 같은 데에서 ‘늙음’을 마주하고 있다. 나는 이전처럼 여전히 젊음을 누리고 있음에도.





하루에 몇 번 다니지도 않는 버스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논가를 달리다 멈추어 섰다. 나는 시골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아주 느리게 버스에 오르시는 할아버지를 지켜봤다. 단정하게 여민 체크무늬 셔츠가 검게 그을린 피부와, 또 왼손에 찬 금빛 시계와 아주 잘 어울렸다. 나는 문득 나의 늙음이 궁금해졌다. 어떤 모습일까. 백발에 유행하는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 할머니였으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해 본 적은 있었지만 어느샌가 과연 나의 생도 그만치 길어질까? 하는 질문이 들어 그마저도 생각하기를 멈추었었다. 그런데 젊음이 생소한 이 마을에서 나는 매일매일 태어난 날로부터 한참 멀리 온 사람들만 보고 있어야 했기에 자연스럽게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 늙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 아직 젊다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꾸준히 늙어가고 있으니 궁금한 것이 마땅하다. 자식을 기다리는 옆집 할머니나 버스에 오른 할아버지와 같은 속도로, 나도, 매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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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이 푸세식이었다는 것 말곤 내 방이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나는 그 집 마당에서 나는 꽤 크고도 오래도록 흙을 만지며 놀았다. 꿈틀거리는 통통한 지렁이를 보며 그 몸에 둘러진 하얀 완장이 가끔 무슨 뜻일까 궁금하기도 하였다. 집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흘렀고 도로와 마주 놓은 짧은 다리가 있었다. 나는 엄마가 준 사과를 몇 개 주워 먹곤 단내 나는 손으로 다리 난간을 잡았는데 마침 거기에 붙어 있던 벌에 쏘여 손가락이 마구 부풀었다. 문제는 그 성난 벌이 주위를 공격적으로 맴돌다 내 눈두덩이를 공격했다는 것에 있었다. 엄마는 된장과 간장을 섞어 내 손과 눈물범벅이 된 눈두덩이에 발랐다. 지금 떠올려보니 엄마는 약간 웃음을 참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기분 탓인가.). 아무튼 나는 그 짭조름하고도 쿰쿰한 손길을 오래 간직하고 있다. 손바닥도 심하게 부풀고 눈은 거의 뜨지 못했지만 왠지 그 요상한 민간요법에 기분이 몹시 좋았던 날. 늘 바쁜 엄마가 웬일인지 집에 있어서 울음을 터뜨리기에 너무 좋았던.


그날 그렇게 장맛을 본 이후로는 그 집에 살 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때의 내 나이조차도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면서 또 희한한 것들은 생각이 난다. 당시 집 근처에 키 큰 오빠가 살았었는데 그 오빠의 할머님이신지, 큰아버지신지 누군가 마당에 대마를 키워 삐요-삐요- 경찰차가 왔던 기억이 난다. 어째서 다른 걸 다 제쳐두고 이런 기억이 생각 나는지 모르겠으나 이젠 그마저도 가물거리기는 한다. 늙는다는 것은 경험이나 기억을 (그것이 눈두덩이에 된장을 바른 것 같은 행복한 것일수록 더디겠지만) 차츰 잃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서울에서 행사 안내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건물에서 학부모님들 행사에 이것저것 안내를 하는 것이었는데 그중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었다. 나는 시간이 나서 잠시 쉴 겸 그 옆에 앉았는데, 뭔가 분위기가 맹숭맹숭하여  어떤 말씀이라도 걸어야 할 것 같아 입을 뗐다. “와, 할머니. 너무 고운 치마를 입으셨어요. 화려한 거 좋아하시나 봐요?” 그때 할머니의 대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아니이, 내가 좋아해~ 낭만적인 거.”



내가 당황한 것은 그녀의 대답이 내 예상과는 달라서기도 했지만 순간적으로 그녀의 빠글하게 볶은 머리가 낭만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든 나 자신이 못마땅해서였다. 대체 나이나 외모 따위가 낭만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무리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라지만 스스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걸어오는 길 내내 낭만에 대하여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과 짝이 되어야 할 것은 없었다. 낭만은 그냥 낭만. 어쩌면 그녀가 나보다 십수 년을 더 낭만으로 자신을 가득 채워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늙어간다는 것은 낭만이라는 단어 같은 것도 좀 더 선명하게 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노 요코의 그림책 중에 <100만 번 산 고양이>라는 책이 있다. 백만 번 죽고, 백만 번 산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다.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얼룩 고양이가 있었다. 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 고양이를 귀여워했고,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자기 자신밖에 사랑하지 않는 얼룩 고양이는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없다.

백만 번째 되살아난 고양이는 도둑고양이가 되었다. 다른 고양이들은 모두 얼룩 고양이를 좋아했지만 그는 늘 심드렁하게 말했다. "난 백만 번이나 죽어 봤다고. 새삼스럽게 이런 게 다 뭐야!" 그런데 그를 좋아하지 않는 하얀 고양이가 얼룩 고양이 앞에 나타났다.

- [책 소개] 중


언젠가부터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죽고 살았다는 얘기를 그만하게 됐다. 그러다 어느 날 하얀 고양이가 고양이 곁에서 숨을 멈추었고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마침내 고양이도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고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다.





늙는다는 건 역시 사라지는 것에 가까운가. 기회나 기억, 건강을 잃어가는 일. 죽음으로 자꾸만 가까이 가는 일. 아니면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사랑이나 낭만 같은 많은 것들을 어제보다 더 선명하게 하는 일인 것일까. 아니면 결국은 사라졌다 선명해졌다 그 둘을 반복하면서 젊음에서 늙음으로 가고 있는가.


나는 백만 번 산 고양이가 결국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는 순간이 좋다. 고양이는 마침내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될 만큼 온전히 제 삶을 살아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러니 나는 늙는다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사라지기만 하지 말고 선명해지기도 해야지, 한다. 다시 새로 할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많은 것들을 이 생에서 선명하게 해 두면 좋겠다. 그래서 백만 번이나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되도록.





버스가 멈추어 섰다. 중절모가 버스 문가에 걸쳐진지 한참이 지나고서야 할아버지는 계단을 오르셨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게 지팡이를 버스 바닥에 팽개치신다. 아아, 버려두었다는 말이 더 알맞겠다. (그에게서 풍겨지는 어떤 쿨 향.) 그는 지금 사라지는 중일까, 아니면 선명해지는 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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