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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Sep 19. 2021

쥐가 나오는 집에 산다는 것



그건 생각보다 꽤 괴로운 일이다. 성가시고,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며 모든 흔적과 소리에 의심을 품게 만들어 정신을 피폐하게 한다. 심할 때는 일상생활이 어렵기도 하다. 어딘가에 묻어버렸을지도 모를 더러움을 찾아 종일 닦아대야 할 수도 있고, 깨어 있는 순간에도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오로지 그것에 대해 생각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내가 쥐가 나오는 집에 산다는 것을 종종 잊기도 한다는 것이다. 습관처럼 드는 볕을 지켜보거나 널어놓은 빨래를 걷으며 오후 4시에 그늘이 섞인 바람을 맞을 때. 낡은 슬레이트 지붕 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거나 그것들이 처마 아래로 끊어질 듯 이어져 작은 고랑을 만들어 갈 때, 찰스가 잡초로 가득한 마당에 덜렁 누워 가려운 등을 긁어댈 때.





이른 새벽을 여는 바깥소리에 잠을 깼다가 다시 선잠을 이으면 어김없이 꿈을 꾸곤 한다. 잠에 깬 것도 든 것도 아닌 상태로 의식과 무의식을 가로지르는 느낌으로. 대개 그런 상태에서 꾸는 꿈들은 그 시간 바깥에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과장되고 왜곡되어 꿈거리가 된다. 그래서 한동안은 쥐가 나오는 꿈을 자주 꾸었다. 우르르 천장을 뚫고 쏟아지는 수백 마리의 쥐떼와 엄청 큰 이빨을 가진 대왕 쥐가 등장하곤 했다. 그 시기에 나는 집 안에 있는 쥐구멍을 막느라 말도 못 할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축축하고 습한 반지하 방이나 낡은 연립 빌라에 살 때는 바퀴벌레를 박멸하느라 골치였는데 시골에 오니 쥐와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낡은 월세방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처지만큼이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그래도 마주치지 않길 내심 바랐는데. 내겐 평소 그리마 같이 순하고 큰 벌레들을 요란 떨지 않고도 잡을 수 있는 정도의 깡이 있었지만 바퀴벌레와 쥐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지저분한 환경에 살면서 바이러스, 이런저런 질병을 옮긴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더러움은 그런 쪽, 그러니까 코 묻은 휴지보다는 세균이 득실거리는 지폐에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바퀴벌레와 쥐를 혐오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이러한 팬데믹의 위협을 느끼기 훨씬 전부터도 나는 주기적으로 수저를 삶고 에탄올로 물건들을 닦는 버릇이 있었다. 공동 화장실에서 비누칠 없이 손에 물만 적시고 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괜히 속으로 그 사람의 위생을 걱정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 결벽을 가진 내가, 쥐가 나오는 집에 살게 되었다니.





초기에 집을 수리하면서 시멘트를 개어 바닥 근처의 쥐구멍을 다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차츰 어디선가 쥐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햄스터 크기의 쥐들이 천장을 갉거나 창호지 문을 뚫고 들어왔다. 매일 작은 쥐구멍들이 새로 생겨났고, 나는 마스킹 테이프를 여러 번 둘둘 감아 쥐구멍을 막기 시작했다. 집 여기저기 볼썽사나운 테이프 자국이 생겼다. 밤낮 할 것 없이 천장으로는 “우다다다-” 쥐 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 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끼쳤던 소름을 생생히 감각한다. 나는 짧은 비명 조차도 지를 수 없을 만큼 몸이 굳어버렸다.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방법도 용기도 생겨나지 않아 그 자리에 서서 도망치는 쥐를 지켜보아야만 했다. 쥐와 대치하는 불면의 밤들이 이어졌다. 나는 견딜 수 없어 뭔가 수를 내야 했기 때문에 급한 대로 슈퍼에서 쥐 끈끈이를 사 와 집 구석 구석에 놓았다. 다행히 안방은 쥐로부터 안전했기 때문에 부엌과 창고방 위주로 놓았는데, 효과가 전혀 없는가 싶을 때쯤 쥐들이 걸려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쥐 끈끈이 근처로 내가 다가갈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끈끈이에 붙어 죽어가는 쥐보다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처지가 더 불쌍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처음엔 형부를 호출해서 끈끈이를 치웠다. 근데 사람은 정말 적응의 동물인지, 이게 몇 번 반복되다 보니 나에게도 요령이란 게 생겼다. 비닐장갑을 끼고 “읍.” 숨을 참고 실눈을 뜨고 쥐로부터 가장 먼 부분을 잡아 안 보이게 끈끈이를 덮어 처리하는 능숙함이 생겼다. 여전히 괴롭긴 했지만 차츰 쥐가 잡히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나는 초음파로 쥐를 쫓아준다는 기계와 효과가 좋다는 쥐약까지 사서 집 주변에 놓았다. 놓는 족족 약이 사라지는 것을 보니 여전히 내가 맞서야 할 상대가 많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스트레스였는지 작게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도 매번 신경이 곤두섰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잠에 들면 어김없이 쥐가 등장하는 꿈을 꾸고 깨어야 했다. 쥐의 똥은 검은깨처럼 생겼는데, 집 안에서 까맣게 생긴 먼지 뭉치만 발견돼도 나는 한참 들여다보다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그쯤 되니 겁도 거침도 없었던 귀촌 생활에 어떤 회의감이 드는 것이다. 나는 그저 마음이나 좀 편하고자 하였을 뿐인데 왜 이다지도 마음고생을 해야 하는 걸까 싶었다. 그 때 만큼은 시골살이의 좋은 점 아흔여덟 가지보단 괴로운 한 두 가지의 일들이 나를 괴롭히게 내버려 두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다행히도 몇 개월이나 이어진 전쟁 끝에 평화는 찾아왔다. 여전히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쥐가 나오는 꿈을 꾸고, 언제 또 쥐가 나올까 경계를 하고 있긴 하지만 다행히 쥐들이 눈에 띄진 않고 있어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누가 알았을까. 바퀴벌레나 쥐라면 견디지 못하는 내가 전라도 어느 귀퉁이 시골에서 쥐를 잡고 있을 줄을. 온갖 종류의 벌레들과 함께 살면서 말이다. 도시와는 다르게 어떤 한 종류를 방어했다 싶으면 새로운 계절에 다른 벌레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집이 없는 민달팽이는 비가 살짝 내린 다음 날이면 집 안 곳곳에 미끄러져 있는데 이제 그쯤은 귀엽다. 한 동안은 또 빨간 다리와 입을 가진 지네가 엄청 나와서 집 둘레를 돌아가며 지네 약을 뿌리기도 했다. 그렇게 크고 힘센 지네는 태어나 처음 보았다. 여름을 떠나보내고 있는 지금의 계절에는 귀뚜라미들이 극성이다.





‘1년만 더, 그래 딱 1년 만.’



시골살이의 신선함이 사라지고 불편함이 부각될 때쯤 이젠 정말 서울로 돌아갈 때라고 생각했다. 이만하면 내게도 충분한 휴식이 되었을 거라고. 내 오랜 바람이었던 것과는 달리 알고 보니 나는 시골과 맞지 않는 사람이구나, 어쩌면 타고난 도시 여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결정을 내려야 할 땐 1년만 더 있자고 스스로를 꼬드기는 것이다. 쥐가 나오는 악몽을 꾸면서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안도하는 아침이 있어서일까. 나의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인데도 나는 스스로를 설득하느라 공을 들이곤 한다. 그래서 올해 ‘1년만 더.’라는 나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마지막으로 속아주기로 하는 것이다.


며칠 연체된 책을 반납하듯 오랜만에 잔뜩 거미줄을 걷어내다 보면 거기에 낚싯줄처럼 번쩍거리는 햇빛이 걸려있곤 한다. 그런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살 집에 쥐가 나올 거라는 걸 알았다면 나는 오지 않았을 거라고. 대신 쥐가 나오는 꿈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들을 실제로 목도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쥐의 목숨을 거두는 것보다 잔인하고 괴로움에 사무치는 어떤 일을 해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러니 쥐가 나오는 집에 산다는 건 어쩌면 다행인 걸지도. 그래, 따악 1년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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