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여자, 시골 프리랜서.
아주 적당한 날이었으려나.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고 읍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웬일인지 앉을 자리도 없이 버스는 어르신들로 붐볐다. 40분이나 달려 버스에서 내리니 단번에 버스가 꽉 찼던 이유를 알았다. 오늘은 읍내 장이 서는 날. 지역에 와서 처음으로 구경하는 5일장이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에도 상설 장을 구경하기 위해 꼭 길을 돌아가곤 했는데 오늘은 전에 볼 수 없었던 활기가 더해져 발길을 더욱 잡아챘다. 나는 요가매트를 등에 매고 잰걸음의 어른들을 지나 아주 천천히 장을 구경했다. 병아리 장수라든가, 엿장수라든가 산만한 내 시선을 잡아채는 무엇은 없었지만 생기 넘치는 장사의 흐름에 괜히 기분이 들떴다. 나는 여행지에서도 거의 늘 시간을 내서 그 지역의 장을 구경하는 장터 마니아다. 시장은, 특히 장날은 어딜 가나 거기서 거기처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역마다 다 다르다. 반찬가게에 진열된 반찬만 보더라도 그 동네 사는 어느 네 식구는 무엇을 찬거리로 삼는지 보인다. 그러니 내가 이런 흥미로운 장날 구경을 마다할 리가.
현금이 좀 있었다면 작은 화분이라도 하나 사서 장터를 벗어났을 텐데 카드만 들고 다니는 버릇을 여전히 고치지 못했다. (겨울이었다면 핸드폰 케이스 뒷면에 붕어빵을 위한 2천 원이 끼어 있었을 텐데.) 아쉽지만 눈요기만 마치고 한껏 상기된 기분으로 카페를 갔다. 작업을 하거나 공부를 할 때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으면 집 근처 별다방을 자주 갔었다. 좋아하는 고소한 커피 냄새와 나를 신경 쓰지 않는 크고 작은 소음 속에 숨어 있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져 일을 진척시키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시골에 온 이상 카페에 가는 건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을 먹고 나가야 하는 탈일상적인 일을 나온 김에, 마침 했다. 약간의 도시 생활의 향수와 괜히 부지런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5,100원에 샀다. 약속한 열두시가 되선 지역에서 알게 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시답지도 않으며 별다를 것도 없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나에게 어쩐지 보이던 벽이 없어진 것 같다고 했고, 나는 왜인지를 얘기했다. 시간이 조금 남아 우리는 작은 창을 낸 카페에 가서 푸른 몸짓의 벼를 풍경으로 커피를 마셨다. 이번엔 그럴듯한 뷰와 그녀와의 시간을 도합 7,000원에 샀다. 특별할 것은 전혀 없었지만 오랜만에 혼자만의 방에서 벗어나니 약간은 신이 났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기까지 했다. 거울도 잘 보지 않는 내가, 오랜만에 누군가가 찍어준 사진을 보며 ‘나는 이렇게 모자라게 생겼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잦은 웃음과 잠깐의 고요가 지나는 시간들. 친구와 헤어지고 나는 다이소에 가서 집게 머리핀, 건전지 같은 것들을 무려 만이천 원 어치나 샀다. 그리곤 일주일에 딱 한 번 있는 요가 수업을 듣고 나왔는데, 마침 소나기가 오길래 저녁으로 동태탕에 소주 한 병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은, 떼인 돈을 받으려면 수임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프리랜서로 일을 받아서 했던 회사로부터 파산 소식을 들었고 그 말은 곧, 나의 얼마 되지도 않는 임금이 결국은 지급되지 못할 거라는 뜻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곧 마음을 비웠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에 감정을 소비하고 싶지가 않아 소액이라 차라리 다행이다 여기기로 했다. 다른 이들이 한 달 동안 버는 월급을 나는 일 년 동안 벌고 또 쓰면서, 그 일부마저도 잃게 된 참담한 순간이었지만 어쩐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와 그 짧은 문자 사이에 불행이란 단어를 끼우지는 못했다. 그냥 오늘이 마침 5일장이었고, 그래서 홀로 또 같이 보낸 시간이 좋았고, 갑자기 내린 소나기와 소주 한 병이 너무 완벽하기만 해서 방으로 들어와 일기를 썼다. 오늘 보낸 하루가 참 특별했다고, 그런 문자를 받고도 웃으면서 맥주 한 캔을 더 했는데 그건 내가 주정뱅이라서가 아니라 순간을 향유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라고(웃음).
촌에 와서 살기로 했다면 응당 농사를 짓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삶을 돌보아야 할 것 같지만 이곳에서 나의 밥벌이는 농사가 아니다. 물론 젊은 인력이 늘 목마른 곳이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복분자나 블루베리를 따러 나가도 되었지만 나는 섣불리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내 생각에 농사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의 경지며, 숭고한 마음이 수반되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음을 조금 가벼이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으나 아무래도 능력이 받쳐주지 않았다. 그렇다, 내겐 햇빛을 견뎌낼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이 없었다. 비흡연자인 내가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빛을 볼 일이라곤 점심을 먹으러 갈 때, 먹고 나와서 커피를 마실 때 말곤 없었다. 모니터 앞에 앉아서 적금 붓 듯 차곡차곡 이자를 불려 온 거북목과 너덜너덜한 손목으로 하루 열 시간을 땡볕 아래서 풀과 씨름한다는 건, 대단한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농사 욕심을 놓아주는 대신 나는 전공도 아니며, 1년도 안 되는 경력을 가진 어설픈 프리랜서가 되기로 했다. 사업자를 내고 최저가와 적절한 성능을 교묘하게 섞어 조립 컴퓨터를 맞추니 다행히도 일이 아주 조금씩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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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수입이 50만 원 이상이신가요?”
“50이요?(오랜만에 듣는 큰 액수라 놀람) 아… 그게, 고정적이진 않은데 평균적으로 50만 원이 되진 않아요. 큽(현실 자각).”
세무서에서 조사를 나와 몇 가지 항목을 체크할 때 조금 머쓱했다는 것 외에 소위 ‘풀칠만 하는’ 적은 수입은 내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했다. 그저, 그 나이에 마땅히 가질 만한 것들을 포기하면 그만이었다. 그건 아주 간단하면서도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임은 확실하다. 나는 때때로 철로를 이탈한 채 쇳내를 풍기며 삭아가는 열차 취급을 받기도 했으니까. 그러면서 또 가끔씩 어떤 사람들은 그럴듯한 장신구나 향수도 걸치지 않은 나를 어딘가 특별하게 보기도 했다. (아마도 그런 시선은 대개 쟨 대체 뭘 믿고 저러고 사나 싶은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명확하게 달라지는 시선에 약간은 어지러울 때도 있었으나 내가 가진 것이 쇳내인지 믿는 구석인지 그 누가 알아줄 필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소소’라는 글자를 의미와는 살짝 다르게 보다 큼직하고 거창하게 적는 것으로 나의 선택을 대변하기로 했고, 그런 스스로를 어여삐 하다 보니 일상은 더할 나위 없는 것의 연속으로 여겨졌다. 지금 내게 밥벌이는 그만하면 되었다. 동태탕에 소주 한 병을 큰맘 먹지 않고도 주문할 수 있을, 딱 그 정도면. 다이소에서 만 원이 넘는 금액을 계산하면서도 집게 머리핀 하나를 추가로 장바구니에 넣을 수 있을 정도의 대담함이면. 친구와의 시답잖은 수다를 위해 시간과 장소를 7,000원에 빌릴 능력 정도를 갖출 수 있다면. 그러니 돈을 떼인 날에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되려 ‘있어 보이는’ 시골 프리랜서로서의 삶은 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