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없이 단번에 쓰는 글
멈췄던 드럼이 다시 시끄럽기 시작했다
아이의 울음은 조금 전보다 크게 들린다
노란 물을 뚝뚝 흘리며 너는 쪽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부엌에 혼자 남아 찬장을 뒤진다 유리잔은 흥건하다
딱 이 정도의 귤 주스를 만들 수만 있다면
너는 계이름을 자꾸 틀리지만 생선 뼈에 자꾸 입천장을 찔리지만
귤 주스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만들지
기다리던 사람이 불평하지 않을 만큼
맛이 참 좋데
애 하나 달랠 줄도 모르는 애가
손톱 밑 상처처럼 잊지 못해
네가 건넨 귤 주스
단숨에 들이켰지
귤이 될 순 없을까
왜 너는 나한테
쪽방으로 들어간 뒤로 말이 없다
그렇게 말을 잘하면서
귤만큼 말하기를 좋아하면서
매일 귤을 먹니?
얼굴이 손톱이 노래지도록
눈물에서도 귤 향이 나니?
나는 그렇게는 못 하겠어
세 손가락으로만 껍질을 까도 충분한데? 심지어는 더 예뻐
귀가 더 큰 코끼리도 만들고 다리 하나 없는 강아지도 만들었어
원하면 가져도 돼 껍질은 뭐
다른 건 필요 없어
맛있는 귤 주스만 만들 수 있다면
이거 봐 사람이 또 왔어
기다리던 사람의 기다림이 끝났어
내 앞으로 오고야 말았어 눈을 마주치고 볼을 벅벅 긁으면서
용기를 내었지
나는 못 해요*
드럼 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곳에서 귤을 따고 있니? (귤은 여기도 있어)
이미 귤이 되어버린 거니? (미리 말이라도 해 주지)
아이는 귤을 아니? 오렌지는? 코끼리는?
솔직히 나는 회의적이야 (기다리던 사람도 그렇게 말했어)
아이가 귤에 대해 뭘 알겠어 벽에 던지고 놀기나 하겠지
너는 마지못해 받아주겠지
귤이 벽에 닿는 건 싫으니까
벽이 노래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기다리던 사람이 등을 돌렸어
어쩌겠어 솔직히
귤 주스는 내가 만들 수 없어
소용없어 솔직히
떼를 써도 소용없어 나는 아이를 어려워하는 사람인걸
너도 벽이 노래지는 건 싫잖아 그치?
이제는 알려준다 해도 배우기 싫을걸
앞으로도 알 수 없기를
너밖에 모르는 비밀이니까
아이를 달랠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도마 위에 흥건한 귤즙
양손을 귤처럼 둥글게 말고
노란 물이 뚝뚝 떨어져
드럼 소리가 잦아든다
아이의 울음도 잦아든다
쪽방은 아직도
근데 솔직히
이제는 알려줘
귤 주스가 뭐길래
그깟 귤로 만든 주스
* 「용기」, 『생각이 꼬리를 무는 좋은 생각 짧은 동화』 中, 이규경, 처음주니어,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