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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Jul 02. 2023

정답 없는 문제만 풀고 싶은데




느닷없이 찾아온 아픔은 느닷없이 떠나간다.

하루 넘게 내리는 소나기는 없다. 대부분 몇 시간 안에 그친다. 아픔도 마찬가지다. 


실체 없는 두려움은 술 한 잔과 함께 마셔버릴 수도, 다른 이와 함께 나눌 수도, 하다못해 폭풍우가 가라앉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반대의 경우는 다르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고민은 그것이 해결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고통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모범 답안은 대부분의 경우 희생을 요구한다. 


문제는 그 희생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하는 데 있다. 금전, 사회적 지위, 자존심 등 육체와 정신을 넘나들며 온갖 무리한 요구를 들이민다.

다친 팔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팔 전체를 잘라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대부분의 현실은 이렇듯 잔인하고 극단적이다. 


이렇듯 현실의 문제는 대부분 생존의 문제이다.

문제를 해결하면 빈털터리가 되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는다. 우리는 <오징어게임>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 영원한 동료는 없을지라도 영원한 고통은 존재한다.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꼴이 퍽 우스꽝스러워도 별 수 없다. 희생이 '숭고'하다는 말은 그 과정이 너무나도 볼품없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내게 찾아올 우울함은 모호했으면 한다. 





혹자는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손글씨로 적어보라 충고한다.

고민을 노란색 메모지에 한 글자씩 손으로 꾹꾹 눌러 적다 보면 그 원인과 결과가 분명해질 터이므로,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이다. 


거짓말이다. 


검은 활자들은 뚜렷해지다 이윽고 나를 집어먹을 기세로 달려든다.

차라리 연기처럼 머릿속을 떠돌다 사라질 것을, 분명하고 확고한 논리를 동원해 공연히 2차원 평면 위에 새기는 셈이다.

이유 없는 슬픔은 무시할 수라도 있겠지만, 이유 있는 슬픔은 그 원인이 사라지기 전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는 거라고. 


수만 명이 진격해 오는 전장 한가운데서 일개 훈련병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다. 한 명이 두 명이 되더라도 달라지는 일은 없다. 가엾은 시체 한 구가 늘어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포탄이 가까스로 빗나가기만을 희망하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것만이 현실의 잔인하고 냉정한 정답이다. 운이 좋다면 적군 몇에게 상해를 입힐지도 모르겠지만, 총구를 제대로 겨누기도 벅찬 게 현실이다.

이러나저러나, 한두 명의 개인이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드는 전쟁의 흐름을 본질적으로 막아 세울 수는 없다. 





답이 없네,라는 탄식 섞인 지인의 혼잣말에 나는 종종 이렇게 받아치고는 한다.

애당초 문제가 없으니 답도 없는 것이겠지. 


해결책이 없는 모호한 고민은 환절기마다 찾아오는 감기와 같아서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준다.

이를테면 연인과의 결별, 막연한 불안함, 월요일마다 찾아오는 무력함 같은 것들이다. 


불가해한 고통일수록 오히려 잘게 쪼개 삼키기 편하다. 역설적이다.

그저 옆에 같이 앉아서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방에서 목청 터져라 함께 소리를 지르다가 또 말없이 그네를 타다 보면 고통은 어느덧 희미해져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답 있는' 고통에 맞서는 법을, 나는 아직 모르겠다. 


선명하고 뚜렷한 나머지 그 해결책과 희생의 방향까지 자명한, 이른바 '선이 굵은 우울함'이 찾아오는 날이면 나는 더더욱 미궁 한가운데에 놓이고 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출구로 향하는 길은 알고 있다. 그것이 가시밭길이라는 게 문제지만. 


미궁 밖의 사람은 어서 나오라고 소리치는데, 나는 피칠갑된 그의 두 발을 보고 있다.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될까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오늘도 꾹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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