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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Jan 14. 2024

연결된 적 없는 아이들

퇴고 없이 쓰는 글

나는 개그콘서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일요일 밤의 공허함을 달래 주는 고마운 존재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없어도 상관없는 그저 그런 프로그램이 되었고 그것이 세상에서 정말 없어졌을 때도 슬프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이 없더라도 나는 언제나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 남겨둘 줄 알았는데. 여름은 영영 지나가 버렸고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기에 녹지 않는 눈덩이만 계속 굴리며 산다.

한때 즐겨 들었던 대만의 피아노곡이 떠올랐다. 듣기 좋아서라기보다는 그 곡을 잘 치고 싶은 마음에 내 손으로 완주했을 때 들릴 박수갈채를 상상하며 곡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중국 가요가 갑자기 내 플레이리스트에 나타나게 된 이유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들켰기 때문일 것이다.




디지몬 세계라면 가능해.

디지몬 어드벤처 28화에서는 태일이의 메탈그레이몬과 에테몬이 최후의 결전을 벌이다 현실 세계와 디지몬 세계의 시공이 뒤틀리게 돼.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 나타난 디지몬을 목격한 어른들은 단순히 한여름밤의 환상이나 착각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어. 자신이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하게 돼. 아, 나도 언젠가 저 디지몬과 만나겠구나. 내가 선택받은 아이라면 언젠가 세계로 넘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겠구나. 다시 말하자면 선택받기 전까지는 누가 선택받은 아이인지 모르니까 나를 기다리는 디지몬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거야. 상상한다고 아무도 혼내지 않잖아. 메탈그레이몬 위에 올라탄 고글 쓴 저 아이가 다른 차원의 나일지도 모르는 거고.

됐고, 결론만 말해줄래?

그러니까 우리는 죽어 있는 동시에 살아 있는 거지. 아직 우리가 선택받은 아이인지 아닌지 모르는 거니까. 여기가 정말 디지몬 세계라면, 조수석 아래에 흥건한 저 피가 내 것인지 너네들 것인지는 이제 정하는 거야.

정해? 뭘로? 어떻게?

라이터를 켜 보자. 켜지지 않는 쪽이 저 피의 주인인 거야.

주인이 정해지면?

피의 양으로 봤을 때 죽지 않을까?

그런 뜻이 아니잖아. 주인을 정하면 한 명이 죽는다는 건데,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 건데.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살아가는 거지.

죽고 싶지는 않지만 살아갈 이유도 딱히 없기는 해.

그런 소리 말고 라이터로 정해.

죽지 못해 살아지고 싶지는 않아.

디지몬 어드벤처 52화에서는 진화하려는 의지와 진화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싸워. 선택받은 아이들은 진화하려는 의지를 가진 편이야. 아동용 애니메이션다운 교훈적인 줄거리지. 살기 위해서는 무언가라도 해야 된다는 일종의 근대적인 프로파간다라고 볼 수 있어.

됐고, 하나씩 집어 들자.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걸 그냥 받아들이는 거야.

지금 인사할까?

인사는 무슨. 야 괜히 슬픈 분위기 만들지 말고 라이터나 집어.

고마웠어.

뭐가?

10년 동안 함께 놀아줘서.

됐고, 아 됐어.

우리 이제 보니 꽤 닮았는데.

내 몫까지 잘 살아라.

하나, 둘, 셋.


멈춘 시간이 흘렀다.

무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네 명의 선택받은 아이들이 몸을 일으키더니 박수를 쳤다. 인사를 하자 조명이 꺼졌다. 처음으로 돌아간 듯 무대 위에는 자동차 한 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연결한 적 없는 기기로부터 로그아웃을 했다.

속초와 로스앤젤레스와 푸젠성.

그동안의 결전을 지켜보고 있었던 나를 닮은 아이들.

계정의 주인은 내가 할게.

그동안 함께 놀아줘서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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