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란 Jan 25. 2024

안티포렌식

퇴고 없이 쓰는 글

요새도 담배 가끔씩 피워?

한 번도 안 피웠거든. 나 호흡기 안 좋은 거 몰랐어?

우리 회사 다닐 때 하루에도 열댓 번씩 옥상 가서 뭘 자꾸 입에 물더만.

아 그거 담배 아니야.

그럼 뭔데?

이름이 뭐였지.

천식 환자들이 쓰는 그 기구 같은 거 말하는 거지?

어, 그거. 매일 물고 살았는데 이름을 잊어버렸네.

살았는데? 지금은 아니야?

응. 목도 안 아프고 기침도 나지 않아.

서울을 벗어나서 그런가.

새로운 직장에서는 로봇 팔이 커피를 타 줘. 진짜 더럽게 맛이 없는데 그게 보약인가 봐.

너네 회사 복지 짱이다.

너도 이참에 준비해서 나와.

어디서부터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만든 파일들 다 어딘가에 따로 보관해 둬. 옮기고 난 다음에 꼭 흔적을 지우는 걸 잊지 말고.

흔적까지 지워야 해? 어차피 그만두면 남인데.

남이라니, 여기 좁은 거 너도 알잖아.

그래?

얼마 전에 옆 팀 동기한테 소개받은 남자 애는 알고 보니 내 전 애인이었는걸.

그 오징어?

그 오징어.

세상 좁다. 어떻게 아는 사이래?

중국 유학 선후배 사이라는데 당시에는 도움을 많이 받았었나 봐. 둘이 꽤 친했던 모양인데.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데 사귀는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걔 원래 그러잖아. 숨기는 게 너무 많아서 결국 가까워지지 못했으니까.

어우, 난 답답해서 이 얘기 끝까지 못 들어.

다른 사람 눈치만 보고 정작 나는 안중에도 없었지.

지 잘난 맛에만 사는 놈이 무슨 연애는 연애야.

최악이었지.

최악이었어.

무척추동물 아니랄까 흐물흐물하게 빠져나가더니 나를 기억조차 못하는 것처럼 살던데.

그런 애는 뜨거운 물에 확 데쳐버려야 해.

근데 자꾸 내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아.

야, 정신 차려.

걔가 막 꿈에도 나와서 그물에 걸린 채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손바닥 열 개로 싹싹 비는데.

야, 꿈 깨.

다시 돌아가도 결과는 같았겠지?

말이라고. 네 척추가 뽑히지나 않은 게 다행이지. 가만 뒀으면 너까지 흐물흐물해졌을 거야.

그러고 보니 그거 걔가 줬었다.

뭘?

그거. 내가 쓰던 천식 환자용 기구.

악랄하고 끈질긴 자식.

이름이 뭐였는지 정말 기억이 안 나네.

검색해 볼까?

아니야, 냅둬. 기억해 봤자 이젠 나한테 필요도 없는 물건인데.

하긴. 공기도 좋고 커피 주는 로봇 팔있는 지금이 훨씬 낫지. 잊어버려, 말끔하게.

오징어는 왜 죽어서도 움직이는 걸까. 악랄하고 끈질기게.

매거진의 이전글 이게 너의 길입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