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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Feb 02. 2024

나락의 해부

퇴고 없이 한 번에 쓰는 글

나는 너를 믿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펭귄의 표정이 너를 닮았을 뿐이야

어깨에 올린 손을 치워줄래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미안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미안하다고 말하는 법이야


척하는 사람이 싫어 알은척 모르는 척 불쌍한 척 괜찮은 척

자신에게 솔직한 게 그리도 어렵니

옷장 속의 저 남자처럼 졸리면 잠들고 추우면 겨울 옷을 꺼내 입고

눈밭을 하루종일 굴러다닌 일을 왜 나한테 설명하니 나는 눈으로 오리를 만들든 쥐새끼를 만들든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미끄러질까 봐 발만 보고 걷는 사람들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

펭귄이 쓰러져 있어도 밟지 않고 빙 돌아가는 것이 건강에 좋다

눈밭에서는 건강한 펭귄만이 살아남는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늙어버렸다는 뜻이라고 옷장 속의 펭귄이 말해준 적이 있다


먹고 싶은 것만 먹고살 수 없으니 믿고 싶은 거라 믿고 살래 내가 너의 슬픔을 손톱마냥 조금 뜯어먹는대도 살이 찌는 것도 아니잖아

옆구리가 시릴 때는 너를 믿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걷고 또 걸어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어 그건 당연한 일이니까

추운 펭귄들끼리 한 곳으로 모이게 되어 있어 그건 누구라도 목격하게 되는 일


늙어버렸다는 것은 너무 많은 옷을 입었다는 뜻 덥지도 춥지도 않은 척하며 옷을 한 벌도 벗지 않았다는 뜻

여름옷을 입은 남자는 마른 체형에 잔근육이 몸 이곳저곳에 붙어 있다


너를 알지 못하니 나는 끝까지 모른다고 말한다

아는 것도 없고 앓는 일도 없지만 조금씩 찬바람이 부는 것을 깨닫고 옆구리의 추위를 느낀다

미처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나는 펭귄의 표정을 찾아 눈밭을 헤매다가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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