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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Feb 14. 2024

라라한 날씨와 스윗한 사람들

퇴고 없이 한 번에 쓰는 글

L은 곧 자신에게 큰일이 닥칠 것이라 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몸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야 한다고, 외부의 위험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있다고,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세 번이나 올려 보낸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게까지 돌려서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10분 정도의 지각쯤은 지각 변동도 일으키지 못한다는 상사의 실없는 농담에도 그는 줄곧 입을 꾹 닫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래를 걱정하거나 불안함에 떠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신에 나머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녹아내리는 빙하 위에서 담담하게 마지막을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을 L에게서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의 끝을 알고 그 끝을 피할 방법도 없음을 아는 사람은 조용히 웃는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하며 웃는다. 들키면 그제야 소리 내어 웃는다. 앞서 걷는 사람들은 소리를 듣고 안심하며 웃는다. 그것이 조용히 웃는 사람의 의도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에게는 조커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카드를 뒤집기 전에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조커는 여왕의 머리 위에 나타났고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다. 나는 조금 놀랐고 L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 카드가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말이다.

순식간에 타로카드의 신이 된 나는 그저 뽑힌 카드를 읽었을 뿐이며 어렴풋한 미래가 꼭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과 눈앞의 미래를 대신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뚜렷한 점괘는 흐릿한 사람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L은 다른 모두가 웃을 때 홀로 웃지 않은 사람이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밖으로 나갔다.

L은 설탕이 적게 들어간 저당 아이스크림을 권했다. 에리스리톨이며 알룰로스 같은 성분 덕분에 설탕 없이도 단맛을 낼 수 있대요. 설탕처럼 건강에 나쁜 건 앞으로 일절 없어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세상이 바람직하다고 L은 말했다. 그의 적극적인 추천에 모두 같은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골랐고 그 역시 같은 것을 집어 들었다. 그럼 무당이 먹는 아이스크림도 있겠네. 상사의 농담에 소리 내어 웃는 대가로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잠시 바깥에서 머리를 식혔다.

모두 똑같은 제품을 고른 상황이 퍽 재밌어 한데 둥그렇게 모여 아이스크림을 들고 찍는데 L은 없었다. 포장지를 벗기고 검은 속살을 입에 가져가려는 L을 말렸다. 한쪽 구석에서 아이스크림을 들고 조용히 웃는 L을 데리고 오자 크게 웃기 시작했다. 민망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진 속 혼자 맨살을 드러낸 아이스크림은 어딘가 결연해 보였다.


L은 집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 카드를 뽑고 싶다고 했다.

퇴근 시간은 지났지만 회의실로 들어가 아까의 상황을 재현했다. 여왕의 머리 위에는 조커가 앉아 있고 백지는 표정을 짓지 않는다.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일과 문제 해결을 위한 카드를 더 뽑았다. 나는 그림을 엮어 이야기를 만들었고 L은 그 이야기를 마음에 들어 했다.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본인만이 알고 있겠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엘리베이터를 계속 보내고 있는 기분이라고 했다.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세요. 옥상까지 가더라도 언젠가는 분명히 내려온다고 나는 말했다. 그 사실을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으니 말이다.


기분이 아주 좋거나 아주 나쁠 때 L은 복권을 산다고 했다.

복권을 사지 않을 때는 이도 저도 아닌 미지근할 때뿐이에요. 나는 그 말이 웃겨서 소리 내어 크게 웃었고 그도 따라 웃었다.

문을 열고 나설 때 훈풍이 기분 좋게 몸을 감쌌다. 이제 뭔지 조금 알 것 같다고 L은 말했다.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고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회사 바로 옆에 복권 가게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분명 모르는 것 같았다.


* 제목은 임솔아 시인의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과 식품 기업 '라라스윗'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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