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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Feb 17. 2024

제갈량은 가방 속에

퇴고 없이 한 번에 쓰는 글

사장은 한 번에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큰소리로 세 번을 부르고 나서야 그는 우리 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느릿느릿 주문을 받고 가는 동안에도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놓이지 않았다. 우리는 애꿎은 물수건만 만지작거렸다.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잘 까먹게 된다는 이야기처럼 양꼬치를 많이 구우면 양처럼 느긋해지는 건가. 민들레 홀씨 같은 하얀 수염이 얼굴 여기저기에 돋아난 중년의 사장은 정말 양을 떠올리게 했다.

논현에 사는 양은 밑반찬을 가져다주며 숯을 데우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거라고 일러 주었다. 숯도 없고 양꼬치도 없고 하다못해 소금 간이 된 땅콩도 없는 테이블에서 우리는 나눌 이야기마저 없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금요일 저녁인데 술이 빠져서는 되겠느냐는 선배의 말을 줄곧 싫어했었는데 앞으로도 예전처럼 꾸준히 싫어할 수 있을지 솔직히 요새는 자신이 없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나눠도 손끝 발끝이 저릴 만큼 짜릿했었다. 안개 너머를 상상하며 마음 가는 대로 말을 뱉어도 혼나지 않던 날들. 금요일도 아니었고 술도 없었지만 위아래로 솟구치던 시소가 있었다.

이제는 날이 개며 사위가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가 보인다. 울타리의 지름만큼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지만 풀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수많은 양들이 서 있다. 양들은 하나같이 풀을 씹고 있는데 개중 풀이 아닌 술을 씹고 있다고 해도 개의치 않을 듯한 표정이다.

안개가 없으니 안개 너머라는 것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이전처럼 말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를 닮은 양의 얼굴과 양의 수북한 털과 양의 하얀 다리와 바닥에 떨어진 양의 똥과 오줌... 그리고 발에 차이는 죽은 양들 뿐이다. 그제야 나는 풀을 뜯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고 선배의 말을 조금 덜 싫어하게 되었고 이런 내가 다른 양들과 다를 바 없이 보이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양에게는 풀 혹은 술이 필요했다.


설원과 공부가주 중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양을 닮은 사장은 느릿느릿 다가와 대뜸 다른 술을 추천했다.

그걸 마실 바에는 제갈량을 마시지.

갱지에 싸인 채 냉장고 한구석을 지키고 있는 단 한 병의 술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현지인의 추천은 틀리지 않는 법이라고들 하니 우리보다 풀밭에 오래 산 양의 말을 듣기로 했다.

미라처럼 몸을 둘둘 감싸고 있는 갱지를 벗겨내자 투명한 병의 표면 위에 쓰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제조일자 2017년 4월 10일. 7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병의 봉인을 열었다는 짜릿함 이후에는 이것이 왜 하필 우리에게로 왔을까 하는 찝찝한 의문이 찾아왔다. 그리고 양의 직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안개 한 점 없는 풀밭에서 눈에 뻔히 보이는 얘기를 잘 나누기 위해서는 풀과 술의 힘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풀은 밋밋했고 술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늦게 도착한 숯이 열심히 타오르며 양꼬치를 굽고 있었지만 이미 우리의 마음은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사장이 가져다준 풀과 술을 먹고 마시고 있다가는 늑대가 쫓아올 것만 같았다. 당장 풀밭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우리는 나누던 이야기를 주워 담을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술이 남으면 집에 가져가도 된다고 덧붙였던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절반 넘게 남은 묵직한 제갈량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쏟아질까 봐 노심초사하게 되는 건 둘째치고 마음을 준 적도 없는 존재를 데리고 오는 게 달가운 경험은 아니었다. 세 번의 설득 끝에 마음을 바꾼 인물을 모티브로 삼은 것과는 딴판이라는 점 역시 은근히 약이 올랐다.

집에 와 장롱 속에 병을 놓는데 엉성하게 난 수염으로 가득한 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사실 양이 아니라 양의 탈을 쓴 양치기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썩은 풀과 술을 먹으며 눈앞에 보이는 양의 풀린 눈과 양의 혓바닥과 양의 맨살 같은 이야기만을 주고받다 잠이 든 틈을 타 털을 밀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양치기는 오늘도 7년 전의 창고에서 술을 꺼내 안개 걷힌 풀밭 위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모든 양은 풀을 뜯고 술을 뜯지만 어떤 양은 구태여 안개를 찾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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