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란 Feb 19. 2024

펭귄, 걷다

퇴고 없이 한 번에 쓰는 글

날지 못하는 새도 새다. 하지만 날갯짓을 연습하는 새에게 펭귄은 그저 굼뜬 육상동물로 보일 뿐이다.

바닥이 꺼지고 범고래가 쫓아와도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게 자연의 흐름에 잡아먹히는 것이다. 누구도 펭귄을 동정하지 않고 동정받을 이유도 없다. 그렇게 흘러가는 게 순리니까.




실수는 누구나 하는 것이라는 얘기도,

그렇지만 실수가 쌓이면 그것도 실력이라는 얘기도,

시간이 지나면 그 실력이 개선될 거라는 얘기까지도 귀가 닳듯이 들어왔다.

연차가 쌓일수록 늘어난 것은 직업인으로서의 노하우가 아니라 위로의 깊이였다.


선임은 나와 달리 날기 위해 낮이고 밤이고 노력하는 새였다. 언제나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바람이 불어오면 몸을 일으켜 조금씩 날개를 펼쳐서 가까운 거리를 날아가 보고 다시 절벽 위로 올라와 다음 바람을 기다리고는 했다. 도통 날 마음이 없어 보였는데도 어느덧 등에 나 하나쯤은 가볍게 업고서 호수를 건널 만큼 듬직한 날개를 갖게 되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도 날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고 나의 날개는 점점 작아져 사람의 팔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 업혀 있을 때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등을 붙잡을 정도의 악력만 있으면 됐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가 하면 내 밑으로 들어온 후임은 날고 싶어 하는데 날 줄 모르는 새였다. 날개는커녕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해 땅을 딛고 일어서는 법부터 가르쳐주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나조차 날아보려 한 적이 없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내가 본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엉겁결에 나는 쪼그라든 날개를 뒤늦게 펼쳐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깨가 결리고 뼈에서 소리가 났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작은 새는 평생 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먼저 날지 못하면 등에 업혀 호수 위를 누볐던 간접적인 비행조차 그는 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어찌어찌 가까운 거리를 날 수 있는 정도가 되었고 작은 새는 나의 어설픈 날갯짓에도 감탄한다. 멋진 비행이 아니기에 민망하지만 그조차도 충분히 높고 아득하다고 말하는 새의 날개가 푸드덕거린다. 깃털이 날리며 코끝을 간지럽힌다. 나에게 저런 가벼운 깃털이 있던가.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해 날개를 위아래로 저었던 적이 있던가. 다른 건 몰라도 이 새는 언젠가 나보다 멋지게 하늘을 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 번은 크게 추락한 적이 있다. 큰 새가 나무에 기대 쉬는 동안 호수를 가 보겠다며 호언장담하며 작은 새를 업고 되지도 않는 엉성한 날갯짓으로 발을 디뎠다. 한동안 바람을 잘 타는가 싶더니 고꾸라져 물속을 한참 헤맸다. 날개가 이렇게 커질 때까지 기본적인 자세조차 잡히지 않았던 내가 한심했고, 한심함을 넘어 등에 업었던 새의 눈치를 보게 됐다. 새는 자신의 탓을 하고 있었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라고, 자신의 시야가 더 넓었더라면 조금은 무거운 이 날개가 휘청거리는 일이 없었을 거라고 미안해했다.


물에 흠뻑 젖어 축축한 몸을 말리며 호숫가에 앉아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새도 사실은 날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했지만 새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날갯짓 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 같았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진심이라고 느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몸을 말린 우리는 하늘 위를 향해 날아가지 않고 걸어간다. 호수를 빙 돌아서 두 발로 천천히 걷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펭귄은 가랑이에 품은 새끼를 내려다본다. 자신을 닮은 탓에 날개 한 번 펼쳐보지 못하고 바다로 가라앉는 어린 새의 눈을 마지막 순간까지 바라보며 그를 감싸 안는다. 무겁고 굼뜨지만 따뜻한 날개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스카르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