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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Feb 20. 2024

비상계단 앞에 서서

퇴고 없이 한 번에 쓰는 글

조급해하지 말아요 지하철에 우산을 두고 내려도 각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열린 천장으로 비가 들어와도 탁자 위 메모지가 조금씩 색을 잃어도

개봉하기도 전에 막을 내리는 영화는 없어요 내가 보기 전까지는 멈춰 있거든요

강남역에는 우산이 많고 우산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우산 안에는 얼굴이 쏟아져요 몸은 앞을 향하는데 눈을 뒤를 보고 있어요

뛰어가는 사람은 없고 뛰어가는 마음만으로 붐비고 있어요

비상계단으로 내려갈 수 없어요 유리문은 열리기 전까지 잠겨 있고 너의 조급함과는 상관없이

태평하게 누워 있는 게 어때서요 웃지 않으면 울어야 한다는 말이 난 싫어요 난 방귀나 뀔래요

잠에서 깨더라도 꿈에서는 깨기 싫어서 한동안 눈을 감고 있어요

초당 육백만 기가바이트의 용량이 눈을 통해 들어온대요 눈앞을 피해 눈알을 뒤로 굴려요 지하철에 뭘 자꾸 두고 내린 기분이 드는데

아직도 여드름이 은하수처럼 나 있나요 빵칼에 베인 흉터는 그 자리에 잘 있나요 다시 등을 마주 보기에 나는 아직도 조급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뭐라 하지 말아요 영화를 빨리 보고 싶은 것뿐이에요 보기 전까지 멈춰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쉽게 믿겠어요 영사기는 항상 등 뒤에서 돌아가고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우산이 멈추고 땅바닥으로 떨어져 뒤집히고 사람들이 일제히

한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면 나도 유리문을 두드릴 거예요 부서져라 두드리다 보면 아래로 이어지는 비상계단이 나타나고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등을 마주하게 될 거예요

눈을 뜨기 전까지 영화는 시작하지 않는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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