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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향기

삼베와 부엌

by 찬란

어릴 적 여름이면 할아버지는 빳빳하게 풀을 먹여 곱게 다린 삼베옷을 입으신다. 성긴 옷감 사이로 바람이 솔솔 통하는 삼베 저고리를 입으신 모습이 꼭 조선시대 양반 같다고 생각했다. 동네 잔치에 가실 때면 할머니가 손수 바느질을 해 만드신 고운 모시 두루마기에 중절모까지 챙겨 입으시고 지팡이를 들고 집을 나서시는 모습이 마치 TV드라마 속 개화기 양반의 외출 차림이다. 외출 후 집에 돌아오실 땐 빈 손이신 적이 없다. 과일이거나 떡이거나 언제나 먹을 것을 사들고 오셔서 손주들에게 건네셨다.

이렇게 멋쟁이이신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인기가 많다. 오후가 되면 대문 앞에서 할아버지를 찾는 이웃어른들을 반갑게 맞아 방으로 들이신다. 찾아오는 손님들은 아랫집 형님과 옆집 동생, 그리고 윗마을 형님들로 가끔 두 분이서 함께 오시기도 하지만 대개는 혼자 오신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께서 준비하신 상차림에 친구분들이 가져오신 막걸리나 소주를 곁들이신다. 친구분들과 한두 시간 담소를 나누시고 문 앞까지 배웅하시며 그곳에 서서 또 수 분동안 더 말씀을 나누신다. 집 안에서는 그리 많은 말씀을 하지 않는 편이셨기에 친구분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궁금하다.

할아버지가 오후 사교모임을 하시는 동안 할머니는 저녁 준비를 시작하신다. 부엌 옆 샘에서 쌀을 씻어 불려놓은 후 쌀뜨물로 국을 앉히시고 그날의 주 메뉴가 될 생선이나 고기 요리를 하신다. 그 다음 밭에서 따온 가지나 오이, 호박, 깻잎 같은 야채로 반찬을 마련하면 오늘도 맛있는 저녁이 준비된다. 할머니의 부엌은 늘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연탄 아궁이와 두 칸짜리 싱크대, 2층짜리 그릇장이 전부인 작은 공간이지만 갖은 양념이며, 조리도구, 각종 냄비가 필요할 때마다 짠하고 나타나 요술같이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부엌 옆에 있는 샘과 장독대, 그 옆으로 연결된 뒷마당에 있는 작은 창고에는 직접 담그신 여러 가지 장과 김치, 곡식, 말린 음식 재료가 보관되어 있다. 손 맛 좋으신 할머니가 만드신 가지나물, 노각무침, 부추전은 한여름 더위를 잊게 하는 별미다. 장마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오늘,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보낸 오후가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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