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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살기! 친정에서

2. 겨울엔 등산이지, 월출산에 가자

by 찬란

고향집에 가면 뭘 할까 종종 생각해 봤다. 고향은 말 그대로 산 좋고 물 좋은,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딸네가 오기를 기다리신 칠순의 아버지는 집에 있는 동안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하라며 운전기사를 자청하셨다. 날씨가 좋은 김에 월출산에 가기로 했다. 어렸을 때 월출산의 정상인 천왕봉에 올라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이번엔 운동화를 신고 가볍게 산책 삼아 집을 나섰다.


월출산은 정상까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위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하고 바위가 많아 등산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오랜만에 찾아보니 국립공원으로 승격된 이후 주변의 주차장과 안내소가 한층 더 잘 마련되어 관리되고 있어 편리했다. 겨울인 탓인지 주차장엔 여유가 있고 입구도 한산했다.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여러 개 있지만 우리는 완만한 경사로로 되어 있는 경포대 구간을 선택했다.

<월출산 경포대로 가는 길>

등산로에 접어들자마자 맑은 공기의 변화가 느껴졌다. 며칠 전 내린 눈이 풀 위에 쌓여 있기도 했지만 계곡의 물은 얼지 않고 졸졸졸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흘러내렸다. 등산을 자주 해보지 않은 두 딸은 월출산에 간다고 할 때엔 썩 내키지 않은 표정이더니 경포대 삼거리까지 1km 정도의 구간이라는 것을 알고 안심한 듯 앞서 걷기 시작했다. 계곡의 맑은 물과 곳곳에 핀 동백꽃에 감탄하며 오르는 동안 벌써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라 하산하는 등산객들을 마주치게 되었다. 위쪽은 아직 얼음이 많은지 다들 아이젠을 손에 들고 내려오는 참이었다. 맨손에 운동화 차림으로 산책을 하고 있는 우리와는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짧은 구간이지만 엄마는 신나게 손녀들과 산을 오르셨다. 동생네 아이들이 학교에 가있는 동안 주민센터에서 요가 수업을 들으셨다더니 코어에 힘이 생긴 것 같다며 기뻐하셨다. 체육회 임원으로 활동하시며 아마추어 배구 선수셨던 아빠는 그때 얻은 무릎 부상으로 맨 뒤에서 천천히 올라오셨다. 구부러진 산길 탓에 아빠가 올라오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잠깐 기다리기도 하면서 우리는 목표지점인 경포대 삼거리에 여유 있게 도착했다. 산에 왜 오르는 것인지 모르겠다던 큰 아이는 가장 먼저 도착해 신나는 얼굴로 이제 내려가서 점심을 먹자고 채근했다. 구름다리와 바람재, 억새밭까지 멋진 곳들이 많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왔다.


주차장 입구 맞은편으로 무위사로 가는 표지판이 보였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무위사는 국보 제13호 극락보전과 극락전아미타여래삼존벽화를 비롯한 많은 문화재를 가진 고찰이다. 초등학교 때 부처님 오신 날 즈음 무위사에 방문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산지 한가운데 외롭게 서있는 극락보전에 왜 그토록 큰 문화적 가치가 있다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지금은 템플스테이를 위한 부속건물들을 비롯해 입구에 찻집과 주차장 등 편의시설이 갖춰져 관광객을 맞고 있다. 극락보전 안의 벽화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생경했는데 색이 바랜 나뭇결의 건물과 달리 빛나는 불상과 어우러진 벽화의 화려함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잠시나마 고요함이 주는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무위사를 나왔다.

IMG_1523.jpeg <무위사 극락보전 경내>
<백운동 정원 이한영 가옥>

다들 배가 고파진 참이라 아빠가 소개하신 저수지뷰의 카페로 가는 길에 설록다원과 백운동 정원이 있었다. 배고픔을 잠시 뒤로 하고 백운동 전시관에 주차를 하고 정원으로 내려갔다. 백운동정원은 꽃이 피는 봄마다 엄마가 친구분들과 소풍을 가시는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처음 가보게 되었다. 겨울이라 화려한 꽃들은 없지만 어디 한 곳 억지스러움이 없이 자연스럽게 배치된 정원을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조선 시대 선비의 마음에 닿는 것 같았다. 하늘 높이 자란 대나무 숲 사이를 걸으며, 또 월출산을 가득 품은 정자에서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좀 전까지 배가 고프다던 두 딸은 "엄마 고향 참 멋진 곳이네, " 하며 웃는다.





논 사이로 난 길을 지나 드디어 저수지가 보이는 마을로 들어섰다. 저수지 앞에는 민물매운탕이라는 간판을 단 작은 식당이 보이고 옆 길로 오르니 드디어 카페가 나타났다. 주변의 정취에 어울리는 한옥으로 지어진 카페는 사문로 98이라는 트렌디한 이름을 갖고 있다. 한옥 마당에 들어서니 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당 바깥쪽으로 저수지를 향해 만들어진 데크에는 파라솔과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지만 바람이 꽤 부는 탓에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바깥쪽 통창으로 저수지가 보이고 내부는 목재로 장식된 멋진 카페가 아이들 마음에도 들었는지 표정이 밝았다. 전통차부터 커피, 에이드 음료까지 선택의 폭이 넓어 즐거운 메뉴 탐험을 한 끝에 각자 원하는 음료와 베이커리를 주문했다. 마침 사랑채처럼 높이 마련된 곳의 좌식 테이블에 자리가 생겨 뜨끈한 아랫목에 앉은 것처럼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사문로 98 내부>

아빠는 들어오시는 길에 마주친 지인분과 잠시 담소를 나누고 올라오셨다. 아빠의 친한 후배분으로 나도 어릴 적에 자주 뵈었던 분이다. 지역사회 활동이 활발하셨던 아빠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각종 모임에 참석해 늦은 저녁 귀가하시는 날이 많았고 엄마는 그런 아빠가 가족보다 친구, 모임을 우선한다며 불만을 가지셨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인연들이 이어져 은퇴하신 아빠의 여유시간을 심심치 않게 해 준다. 다만 이명과 함께 심해진 난청으로 인해 보청기가 없이 편하게 대화하기 어려워지신 것이 안타깝다. 은퇴하신 후엔 좋아하시는 책도 읽고 영화도 보시고 여행도 다니시며 즐겁게 지내시길 바랐지만 책을 읽기에 눈이 침침하고, 영화를 보기 위해 보청기의 도움이 필요하고 여행을 마음껏 다니기엔 무릎이 아프신 부모님의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침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카페에서부터 노곤해 보이던 아이들은 곧 잠이 들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저녁 메뉴를 고민하시는 걸 보니 엄마는 오늘의 외출이 무척이나 행복하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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