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를 돌보는 것은 곧 나를 돌보는 것과 다름없다
“병자를 돌보는 것은 곧 나를 돌보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하면 그대들은 큰 복을 얻을 것이다.” — 붓다
병자를 돌보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된 일이자,
가장 고귀한 일이다.
간병은 육체를 돌보는 것을 넘어,
마음과 생명 전체를 어루만지는 행위다. 붓다는 말씀하셨다.
“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것은 곧 나를 간호하는 것이다.
나 또한 몸소 병자를 간호하고 싶기 때문이다.” -붓다-
그러나 간병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
냄새나는 대소변을 받아내고,
혼자서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는 이를 매 순간 보살핀다는 건
사람의 의지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을 내려놓고,
수행자의 자세로 아내를 간병하자고 다짐하지만,
그 다짐은 또 수십 번 흔들리고 무너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마음을 다잡고
하얀 병실의 시간 위를 걷는다.
시계는 여전히 천천히 흐르고,
창밖의 계절은 병실의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간다.
아내를 A 상급종합병원에서 회복기 재활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아내의 상태로 보아서는 A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거의 강제로 퇴원을 해야 했다. 재활병원 입원실 잡는 절차도 쉽지가 않았다. 어느 재활병원으로 가야 할까? 5곳 재활병원에 전원서를 보냈지만 회답이 없었다.
입원실이 만원이라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A병원에서는 빨리 나가라고 하고~
초조하고 막막했다.
아직 아내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데~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빨리 재활병원에서 소식을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아내의 손을 잡고 있는 나의 손—
그 손은 더 이상 단순한 육신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말 없는 기도이며,
작은 치유의 길이며,
이 모든 날들을 건너가는 조용한 배 한 척이다.
그녀는 말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손을 잡고 있는 동안,
그녀의 마음은 조용히 내게 말을 건넨다.
고통과 불안,
외로움의 파도 속에서
내 손을 타고 흐르는 따스함이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음을—
“괜찮아. 나는 여기에 있어.”
나는 생각한다.
이 손은,
처음 그 사람과 마주 잡던 그날부터
언제나 인생의 언어를 대신해 왔다는 것을.
웃음이 넘치던 날에도,
말다툼 끝에 등을 돌리던 날에도,
이 손은 묵묵히 곁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병실에서의 손길은
다시 하나의 기도이자, 형상이다.
삶과 죽음, 희망과 체념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이 손은 다시 말을 건넨다.
“나는 아직 여기에 있어.”
간병의 시간은 여전히 느리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이 느린 시간이야말로,
진짜 시간이라는 것을.
세상 바깥은 늘 바쁘고 시끄럽지만,
이 병실 안의 시간은 숨결처럼 고요하고,
무엇보다 정직하다.
나는 그 고요함 속을
그녀와 함께 걷는다.
그녀의 숨결을 따라
나도 천천히 숨을 쉬며,
내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다.
기저귀를 갈고,
냄새나는 대변을 닦아낸다.
'불구부정(不垢不淨) —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그러하지만,
중생인 나는 여전히 분별심을 벗지 못한다.
대소변은 아직도 내겐 더럽고,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이 수행의 자리도 결국은 고귀한 자리일진대,
나는 아직 그 진흙을 두렵게 여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아내의 손을 부여잡으며,
내 안의 중생도 함께 다독인다.
어쩌면 병실의 시간을 걷는다는 것은
그녀의 아픔을 지나
나의 어제를 지나
수행자의 마음으로 우리의
내일로 나아가는 순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례의 끝에서
우리는 말없이 웃을 수 있기를.
그녀도, 나도—
이 시간을 살아냈다고,
손을 맞잡은 채 조용히 속삭일 수 있기를.
나는 인간의 자연회복력을 믿는다.
아내의 손을 잡고 간절한 기도에 응답일까?
강남에 소재한 C 재활병원에서 병실이 났다고 연락이 왔다! 가장 입원하기 힘든 우수 재활병원이라는 간호간병통합 병실로 아내를 옮겼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간병인 한 사람이 6명을 돌보는 병실은 아내의 섬망증세를 더 심해지게 했다. 면회시간도 병원에서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루에 30분만 주어졌다. 날마다 면회를 갔다. 병실 출입도 제한되어 병원 로비여서 휠체어에 실려 나오는 아내를 맞이해야만 했다. 면회를 갈 때마다 아내를 울먹이며 더 이상 통합병동에 있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했다. 말이 간호간병 통합서비스이지 실재는 너무 달랐다. 아내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내가 직접 간병을 할 수 있는 병동으로 옮겨야 했다. 입원비가 훨씬 비싸지만 병실을 옮기고 직접 내가 간병을 하니 아내는 곧 안정되었고, 회복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하지만 재활의 시간은 느리다. 병원비는 반대로 점점 늘어나는데, 재활의 시간은 느리게만 갔다. 어쩔 수 없다. 기다려야만 했다. 함께 하는 고통의 시간, 병실의 시간은 느리게만 갔다.
그래도 고통 앞에서,
나는 부정보다 기도를 택하고 싶다.
절망 속에서도,
나는 분노 대신 꽃을 피우고 싶다.
하지만 나는 매일 아내의 병상 곁에서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나 걷는다.
인간의 자연회복력은 단지 육신의 치유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을 일으키고,
세계를 다시 밝히는 힘이다.
자연처럼 회복하고,
태양처럼 긍정하고,
봄처럼 다시 피어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은 아직 차갑지만,
나는 그 안에 작은 불씨 하나를 품고 있다.
그 불씨로 아내를 데우고,
길을 밝히고,
마침내 다시 살아가고 싶다.
지금 내가 걷는 이 병원의 복도,
이 한 걸음 한 걸음이
하얀 병실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 회복의 희망이 되기를—
나는 조용히, 간절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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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별은 침묵으로 나를 위로했고,
기도는 나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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