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병은 인내와 사랑이 시간이다
사람은 누구나 떠나야 할 이유를 품고 산다.
여행은 핑계가 아니라 삶의 또 다른 방식이다.
누군가는 힐링을 위해 떠나고,
누군가는 잊기 위해 떠난다.
그리고 어떤 이는 아프기 때문에 떠난다.
나는 늘 생각했다.
여행은 돈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흔히 “돈이 없어서 여행을 못 간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배낭 여행길에서 부유한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다만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지닌 사람들만 있었다.
2003년, 내 책 『사랑할 때 떠나라』가 세상에 나왔을 때, 그 서문에는 개그맨 전유성 선생님의 한 줄 글이 실려 있었다.
여행은 무슨 핑게거리가 있더라도 떠나야 한다. 여행은 돈이 있어야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여행 다니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에게도 돈이 남아돌아서 여행을 왔지요 라는 얘기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여기 두 사람은 여행하기에 너무나 근사한 핑게거리를 자지고 있다. 아프니까 떠난다.
-개그맨 전유성
나와 일면식도 없었던 그분은 내게 말하지 않고 직접 출판기념회장을 찾아와 이 한마디를 툭 던져 주셨다.
“선생님처럼 아플 때는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잘 몰라요. 두 분 앞으로 건강 잘 챙기시며 여행도 많이 하세요.”
이처럼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던 전설적인 개그맨 전유성 선생님도 지난 9월 별세하셨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하지만 하늘나라로 영원히 여행을 떠나신 선생님은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어떻게 하면 더 웃게 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할까를 생각하고 계실 것이리라.
그의 따뜻한 위로는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분이 세상을 떠난 지금,
나는 그 말의 뜻을 더 깊이 깨닫는다.
떠남은 도피가 아니라, 사랑을 향한 순례라는 것을.
아내는 마음과 육체가 아팠지만,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나는
마음이 더 아팠다.
마음과 육체가 아픈 우리는 손을 잡고 길을 떠났다.
루푸스와 제1형 당뇨, 심부전이라는 고통 속에서
아내의 마지막 소원은 ‘죽기 전에 세상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표를 내고, 아이들에게 짧은 유서를 남겼다.
“우리는 잠시 떠난다. 걱정 말아라. 이 세상 어디에서 멈춰도, 그것 또한 우리가 택한 길이니 후회가 없다.”
그 여행은 기적이었다.
아내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났다.
낯선 나라의 공기와 산과 바다,
그 모든 낯섦이 약이 되었다.
여행은 아내를 살린 명약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또다시 우리를 시험했다.
심장이식, 그리고 지난해의 뇌출혈.
나는 이제 병실이라는 또 다른 길 위에 선 여행자였다.
아내가 쓰러진 후, 나는 1년 동안 재활병원에서 24시간 간병인으로 살았다.
낮과 밤의 구분이 사라진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사랑을 기도로 바꾸는 법을 배웠다.
매 끼니를 챙기고, 약을 건네고,
굳은 손가락을 펴주며 다리를 들어 올릴 때마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예배의 기도처럼 느껴졌다.
창가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은 수행의 종소리였고,
나는 그 빛 속에서 다짐했다.
“오늘도 사랑으로 돌보자.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 하루를 한 편의 명상으로 살자.”
그리고 어느 날,
아내가 내 손을 잡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 발걸음은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기적이었다.
그녀의 한 걸음은 천 번의 기도였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사랑은 치유의 다른 이름임을.
퇴원 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간병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아파트의 침실을 병실로 개조했다.
그곳은 단순한 병실이 아니라,
우리의 수행 도량이자 사랑의 도장(道場)이 되었다.
하루 세끼의 식사,
네 번의 혈당과 혈압 체크, 인슐린 주사,
재활운동, 그리고 잠들기 전 손을 잡는 시간.
그 모든 순간이 살아 있는 명상이 되었다.
나는 이제 멀리 떠나지 않아도 늘 여행 중이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새로운 나라의 냄새로 스며든다.
아내의 숨결과 미소, 그것이 나의 풍경이고 나의 길이다.
새벽 명상 ― 고요 속의 다짐
새벽 네 시, 도시가 잠든 시간.
나는 창문을 열어 바람의 숨결을 맞는다.
먼저 아내의 이마에 손을 얹고 맥박을 느낀다.
그 리듬이 오늘 하루의 첫 기도다.
“오늘도 인내와 사랑으로 돌보게 하소서.
이 하루가 수행이 되게 하소서.”
낮의 돌봄 ― 사랑의 노동
혈당을 재고, 인슐린을 주사하며 하루를 연다.
아내의 다리를 들어 올릴 때마다 내 숨결이 따라 흐른다.
좁은 거실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걷기 시작한다.
아내의 한 걸음은 세상을 향한 소중한 생명의 발자국이다.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나는 수행의 리듬을 찾는다.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닿는 순간, 모든 피로가 녹아내린다.
저녁 감사명상 ― 하루를 마무리하며
밤이 내리면 손을 잡고 눈을 감는다.
별빛이 들지 않는 병실에도 감사는 빛난다.
“오늘도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오늘 하루를 견딘 우리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녀의 숨결이 내 숨결과 섞일 때,
나는 깨닫는다.
사랑은 수행이며, 돌봄은 깨달음이다.
간병은 인내와 사랑의 시간이다.
우리의 삶은 늘 여행이다
이 하루는 특별한 일이 없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천 번의 기도와 만 번의 사랑이 있다.
이 길은 병든 몸을 돌보는 여정이 아니라,
두 영혼이 서로를 비추는 순례의 길이다.
삶은 결국 한 번뿐인 여행이다.
떠나지 않아도 떠나고,
멈춰 있어도 길 위에 있다.
오늘도 나는 속삭인다.
“아플 때는 떠나라,
그러나 떠남은 도피가 아니라 사랑의 확장이다.
그리고 더욱 사랑하라,
그 사랑이 곧 깨달음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