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스테르담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다음날 아침 우리는 일단 밖으로 나가 무작정 걷기로 했다.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밤새 쪼그리고 앉아서만 왔으니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장거리 비행으로 몸은 피곤했지만 운하를 따라 산책을 하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이 답답한 도미토리에 누워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였다. 호스텔 바로 앞으로 흘러가는 운하에 한 떼의 오리들이 한가로이 헤엄을 치며 놀고 있었다. 잔잔한 운하 위로 작은 곤돌라가 유유히 지나갔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걷고 나니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호스텔에서 담 광장까지는 그렇게 멀지가 않았다. 거리엔 형형색색의 트램과 버스가 오가며 도시를 역동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모자이크를 하듯 흰 줄로 그어진 유리창이 달린 암갈색 건물과 집들이 거리를 산뜻하고 예쁘게 치장을 하고 있었다.
“여보,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먼저 어디를 가고 싶소?”
“으음, 안네 프랑크의 집이요.”
“아하, 안네의 일기를 보고 싶다 이거죠? 좋아. 그럼 안네의 집을 먼저 본 다음에 고흐 미술관으로 가기로 해요.”
“당근이지요.”
“그런데 걸어서 가도 되겠소? 20여분 정도 걸리는데.”
“나는 지금 정말 좀 걷고 싶어요.”
“흐음, 그 왕성한 힘이 어디서 나오지?”
“당신도 알잖아요. 난 여행을 떠나오면 없던 힘이 나온다는 거. 호호.”
정말 그랬다! 아내는 여행만 떠나오면 초인적인 힘이 어디선가 솟아 나왔다. 밤새 비행기를 타고 온 피곤함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흐음, 아내에겐 역시 여행이 명약이야. 어쨌든 떠나기를 잘했어.”
담 광장에서 안네의 집까지 걸어가는 데는 운하를 세 개나 지나가야 했다. 안네 프랑크의 집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삐거덕 거리는 바닥을 밟으며 안내의 집으로 들어서는데 내부는 어둡고 침울했다. 작은 집, 비좁은 다락방, 창문 한번 열어보지도 못하고 두 가족이 이렇게 좁은 방에서 2년 동안이나 지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비밀 입구를 가리키는 서가와 안네가 영화잡지에서 오려 벽에 붙였다는 사진들이 손 떼가 묻은 채 아직도 남아있어 더욱 애틋하게 했다.
"언젠가 이 무서운 전쟁은 끝이 나겠지. 우리가 단지 유대인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정받는 날이 반드시 올 거야(1944년 4월 11일)." 허지만 안네는 결국 1944년 8월 나치에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후 사망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참혹하게 죽어가다니 지금 보아도 슬픔의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내는 너무 슬프고 답답하다면서 그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 나온 우리는 트램을 타고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으로 향했다. 트램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운하와 암갈색 벽돌 건물들을 지나갔다. 나는 암스테르담을 세 번째나 방문했는데도 이런저런 사유로 고흐 미술관을 가보지 못했다. 그림책에서 보았던 고흐의 ‘해바라기’, ‘감자 먹는 사람들’, ‘까마귀 나는 밀밭’, '고흐의 구두'를 꼭 보고 싶었다. 내가 암스테르담에서 제일 먼저 가고 싶었던 곳은 바로 이 그림들을 볼 수 있는 고흐 미술관이었다.
“여보, 고흐의 그림이 그토록 보고 싶은 특별한 사유라도 있나요?”
“난 어린 시절에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했거든.”
“정말요?”
“초등학교 땐 내가 그린 그림이 항상 교실 뒤 게시판에 붙곤 했어요.”
“그럼 화가가 되어 보고 싶은 생각도 났겠네요.”
“한 때 그런 꿈도 꾸어보기도 했었지. 특히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너무도 좋아했어요.”
“그래서 경이가 당신의 그 소질을 타고났나 보지요.”
“그랬는지도 모르지.”
경이가 미술대학에 가리라고는 예측 불허의 일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난데없이 미술대학에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아내와 나는 매우 당황스러우면서도 놀랐다. 경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원하는 미술대학엘 들어갔다. 졸업을 한 후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는 길을 걷고 있지만,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했던 내 기질을 다소 타고나지 않았을까?
트램을 타고 거리를 구경하다가 파울러스 토터스트라트라는 거리에서 내리니 바로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이 보였다. 미술관 입구 기념품 숍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깃발로 만들어 걸어놓고 있었다. 해마다 1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는다는 고흐 미술관 역시 흰색 모르타르를 갈색 벽돌에 붙여놓은 수수한 건물이었다. 벽돌 벽에는 커다란 창문이 커튼도 없이 달려있었다. 나는 입장권을 사들고 아내와 함께 고흐미술관으로 들어갔다.
“당신,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조금 어지러워요.”
“빨리 혈당을 한번 체크해보자고.”
막 미술관 건물로 들어섰는데 아내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오, 마이 갓!" 나는 아내를 부축하여 의자에 앉히고 혈당을 재보니 50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저혈당 증세였다. 재빨리 초콜릿을 가방에서 꺼내어 아내의 입에 물려주고, 주스를 사 와 마시게 했다. 땀이 뒤범벅이 된 아내는 온몸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여행 첫날부터 아내는 심한 저혈당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다행히 20여분이 지나자 아내는 부스스 눈을 뜨며 의식을 회복했다.
장거리 비행에 너무 많은 걸은 탓일까? 나는 아내의 저혈당 증세를 자주 지켜보았기에 응급조치 방법을 숙지하고 있다. 저혈당이 오면 주스나 초콜릿 등으로 당분을 빨리 섭취하도록 하고 이어서 빵 등으로 탄수화물을 먹어 주어야 한다. 그러면 대부분 20~30분 후면 회복되어 혈당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저혈당 증세가 아주 심한 경우에는 구급차를 불러 병원 응급실로 가서 혈관에 당분 주사를 맞아야 빨리 회복이 된다.
"여보, 여기가 어디지요?"
"응, 여긴 고흐미술관이야.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네, 이젠 괜찮아요."
"큰 일 날 뻔했네. 여기 빵이 있으니 좀 먹어요. 그리고 기운이 좀 차려지면 숙소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빵을 먹고 나면 곧 회복이 될 거예요. 난 여기 좀 누워 있을 테니 당신 혼자 얼른 돌아보고 나오세요."
“아니야, 괜찮아. 미술관은 나중에 봐도 돼.”
“관람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난 곧 회복이 되니 빨리 들어가세요."
“괜찮다니까. 고흐 그림은 내일 와서 보면 봐요.”
“여보, 나 정말 괜찮다니까요. 오늘 보지 못하면 입장료를 또 내야 하지 않아요. 아까보단 한결 나아지고 있어요.”
아내의 말처럼 마감시간이 점점 임박해지고 있었다. 아내는 입장료가 아깝다며 날더러 빨리 들어가서 보라고 재촉을 했다. 나를 재촉할 정도로 성화를 부리는 정신상태이면 아내의 저혈당 증세가 거의 회복단계에 들어서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아내를 의자에 두고 홀로 전시실로 들어갔다.
전시관 입구를 들어서니 어두운 방, 희미한 등불 아래서 감자를 나누어 먹고 있는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 때 탄광촌에서 전도사의 길을 걷기도 했던 고흐는 비참한 생활을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책에서만 보아왔던 '해바라기', '고흐의 구두' 바라보노라니 바로 고흐가 마치 옆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노란색을 유난히 좋아했던 고흐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아를에서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아틀리에 전체를 해바라기로 가득 채우고 싶다고 할 정도로 해바라기를 좋아했다.
드디어 '까마귀 나는 밀밭' 앞에 섰다. 그림은 노란 밀밭과 하늘로 양분화되어 있고, 어두운 하늘에는 까마귀들이 어지러이 날고 있다. 불안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음일까? 밀밭으로 끝나는 지평선 너머에는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황금 밀밭 위에는 갈 곳을 잃은 두 무리의 흰 구름이 외로이 떠있다. 고흐는 이 구름을 자신과 동생 태호의 방황하는 영혼이라고 했다.
불타는 것처럼 보이는 밀밭에는 세 갈래의 길이 출구가 막힌 채 막다른 길로 뻗어있다. 그의 미래는 검은 구름과 까마귀, 출구가 없는 막다른 길뿐이다. 검은 구름 밑에는 노란 밀밭이 풍성한 수확을 노래하며 마지막 영광스러운 춤을 추고 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붓질은 지금도 고흐가 살아있는 듯 이방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는 이 밀밭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쏜 고흐는 피를 흘리며 여인숙으로 기어와 죽음을 맞이한다. 파리에서 달려온 그의 동생 태호에게 그가 한 마지막 말을 남긴다.
“정말 내게는 너무도 힘들었다. 나처럼 속수무책인 사람을 본 적이 있니? 나는 권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니 말이야.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한 적이 없어…”
한 번도 자신의 삶을 부정해 본 적이 없던 가난한 화가의 일생.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굳게 믿었고,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조건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그림은 생전에 단 한 점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오직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그의 그림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귀를 자른 그의 자화상은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팔려 나가기도 했다. 무덤 속에서 그가 이 사실을 알면 무어라고 할까?
우연히도 우리 집에는 경이의 졸업작품인 '고흐의 선반'이라는 명제가 붙은 도자기 공예작품이 거실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작품에는 고흐의 자화상과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고,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었던 ‘시엔’이 벌거벗은 채 웅크리고 앉아있다.
경이의 이 작품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어린 시절 그토록 좋아했던 고흐를 딸 경이가 좋아하여 그린 것도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경이가 졸업 작품 전시회를 인사동에서 연다고 하여 아내와 나는 전시장을 찾아갔었다. 우리는 전시장 입구에 전시된 경이의 작품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경이의 작품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냥 간단한 소품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벽의 한 면을 장식할 정도로 대작인 데다, 그림의 소재가 온통 고흐의 그림으로 장식된 것이 나를 놀라게 했던 것.
경이가 졸업 작품을 그린다고 하여 대학의 작업실로 몇 번 무거운 진흙을 실어다 준 기억은 있었지만 그토록 큰 작품을 만들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경이는 대학 작업실에서 졸업 작품을 만들다가 무거운 물레를 떨어드려 그만 엄지발가락이 깨지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경이는 발가락에 깁스를 하고 매일 병원으로 통원치료를 다녔었는데, 그런 아이를 두고 우리는 로키산맥으로 여행을 떠났었다. 여행을 떠난 지 한 달 후에 돌아왔었는데, 그때까지도 경이는 절뚝거리며 통원치료를 다니면서 졸업 작품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경이는 우릴 전시회에 초청을 하였다. 어찌나 미안했던지….
아무튼 경이의 졸업 작품은 우리 집 가보 1호로 거실에 소중히 보관되어 365일 전시되고 있다. 덕분에 나는 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작품을 늘 감상하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고흐처럼 가난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평생 동안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고흐의 까마귀 나는 밀밭 앞에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데 누군가 네 등을 살짝 두들겼다. 돌아보니 아내 정희였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지요?"
"응, 까마귀 나는 밀밭이야. 당신 괜찮아졌어?"
"네, 이젠 괜찮아요."
오직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아픔을 이겨나갔던 고흐와 오직 여행으로 자신의 병을 이겨내는 아내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둘 다 치열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고흐가 정신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마지막 죽는 날까지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며 고통을 이겨낸 사람이라면, 갑작스러운 난치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도달했던 아내는 자신에게 덧 씌워진 난치병을 여행이란 묘약으로 치료를 하며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조금 어지럽다는 아내의 손을 잡고 나는 고흐의 해바라기와 까마귀 나는 밀밭, 감자 먹는 사람들, 그리고 고흐의 구두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저 그림들은 경이의 졸업 작품에 그려져 있는 것들이네요?”
“그러기에 더욱 놓쳐서는 안 될 그림들 아니요.”
“정말 그렇군요. 안 보았더라면 크게 후회할 뻔했어요.”
미술관을 나오며 아내는 고흐 그림을 둘러보길 잘했다고 좋아했다. 밖으로 나오니 고흐의 해바라기 작품이 그려진 깃발이 가을바람에 쓸쓸히 나부끼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해바라기가 고흐의 영혼이 펄럭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나는 화랑 앞에 있는 노점상에서 사과를 몇 개 샀다. 아내와 나는 사과를 바지에 쓱쓱 문질러 우지직 씹으며 국립미술관 쪽으로 걸어갔다. 사과 맛이 상큼했다. 그런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도 피할 겸 저기 카페에 들어가 뜨거운 커피라도 한잔 할까?”
“그거 좋지요.”
비를 피해 노점 카페로 들어가니 파라솔 밑에 앉아 있는 동양인 노부부가 한국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내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번 세계일주 여행길에서 만난 첫 한국인이다.
“어르신 정말 반가워요!”
“나도 반갑소. 어디서 오셨소?”
“저희들은 서울에서 왔습니다.”
“그럼 두 분만 이렇게 여행을 다니시는 거요?”
“네.”
“참 대단들 하시네! 우리는 경남 부곡에서 왔는데, 이번에 조카가 독일 베를린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어 왔다가 조카와 함께 이곳에 잠시 여행을 왔어요.”
노부부는 부모를 일찍 여읜 조카가 공부를 잘하여 독일로 유학까지 보내게 되었다고 했다. 조카는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고, 조카의 학위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노부부는 독일까지 왔다고 했다. 우리는 커피 향을 맡으며 노부부와 조카 사이의 아름다운 사연을 들으니 가슴이 훈훈해졌다.
“세상이 이렇게 넓고 볼만한 곳이 많은데, 우린 참으로 우물 안 개구리 세상을 살아온 것 같아요. 조금만 나이를 덜 먹었더라도 두 분처럼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이젠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마음뿐이랍니다.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다. 시간과 돈이 다 생기고 나니 이제 늙어서 걸을 수가 없더라.' 이 말이 정말 실감이 나요. 이 핑계 저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 흘러버렸어요. 두 분이 너무나 부럽소이다.”
“제가 생각하기엔 아직도 충분히 여행을 다니실 수 있어 보이는데요.”
“허허, 그렇게 생각을 해 주시니 고맙소. 부곡에 오실 기회가 있거든 꼭 한 번 들려주시오.”
“네, 감사합니다. 여행 잘하시고 건강하세요.”
“댁들도 건강하시오.”
이름과 주소까지 수첩에 적어 주면서 짧은 순간 만남인데도 이별을 아쉬워하며 손을 흔들어 주는 노부부가 너무도 고마웠다.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다’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던져주고 멀어져 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그래, 더 늦기 전에 떠나오길 잘했어." 나는 속으로 혼잣말처럼 되뇌며 기운을 되찾은 아내를 바라보았다.
노부부와 헤어진 우리는 다시 트램을 탔다. 꽃의 나라 네덜란드는 봄에 방문을 하면 꽃 속에 묻히고 만다. 특히 튤립축제가 열리는 4월 중순에서 5월 말경에 방문을 한다면 멋진 튤립 관광을 할 수 있다. 세계 최대 튤립공원인 쾨겐호프에서 재배된 튤립축제가 운하 위에 화려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을이었다.
“자, 빨랑 내리시지요?”
“여긴 어딘데요?”
“내려 보시면 곧 알게 됩니다.”
우리는 싱겔 운하에 자리한 꽃시장에서 내렸다. 가을인데도 꽃시장엔 엄청난 꽃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머, 여긴 꽃시장 아닌가요?”
“600만 송이의 튤립을 그대 품 안에!”
아내는 유난히 꽃을 좋아한다. 아내와 나는 4월 1일 만우절 날 아내가 가꾼 정원에서 약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결혼식은 국화 일곱 송이를 주고받으며 유달산 기슭 어느 작은 암자에서 올렸다. 일찍이 꽃꽂이를 배워 오랫동안이나 꽃꽂이를 가르치기도 했던 아내는 꽃시장에 오자 입이 함박처럼 벌어졌다. 꽃시장에는 꽃은 물론 씨앗에서 각종 화분에 이르기까지 꽃에 관련된 모든 물건을 팔고 있었다. 아내는 꽃 모양의 마그네틱과 작은 액세서리 몇 개를 샀다.
“자, 이 꽃을 받아주세요.”
“아, 이 예쁜 튤립!”
내가 튤립 한 송이를 아내에게 내밀자 꽃을 받아 드는 아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픔도, 슬픔도, 어려움도 모든 것을 잊어버린 가장 밝은 표정. 늘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꽃시장에서 나온 우리는 렘브란트 하우스까지 걸어갔다. 렘브란트 하우스는 벼룩시장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데, 5층으로 된 조그만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그가 생활을 했던 살롱, 식당, 침실, 프레스 작업실 등이 적나라하게 진열되어 있다. 그는 빛과 어둠의 화가다. 우리는 국립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야경’을 잠시 관람을 했었는데, 빛과 어둠의 명암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명작이었다.
렘브란트의 하우스를 나오면 바로 운하와 연결되고 운하 근처에는 카페가 늘어서 있다. 암스테르담은 카페 문화가 일찍이 발달한 도시다. 일명 '브라운 카페'라고 불리는 카페가 도처에 널려있다. ‘갈색 카페’를 의미하는 이 명칭은 사람들이 담배나 하시시(인도 대마초의 일종)를 너무 피어 대어 그 연기 때문에 실내에 얼룩이 많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조르단 지구에 있는 카페 스말러는 양조장 겸 시음장으로 200년이 넘도록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가 들른 카페에도 예외 없이 사람들은 편안한 자세로 앉아 하이네켄 맥주나 쥬니버(네덜란드 식 진. 부드러우면서도 독한 맛을 냄)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카페 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이 배어 있었다.
“어휴, 이 담배연기.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어요.”
아내는 카페 문을 들어서자 말자 담배연기에 질려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담배연기라면 질색을 하는 아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할 수 없이 아내의 뒤를 따라 나온 나는 운하 위에 있는 노점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낀 카페보다는 노점 카페 분위기가 훨씬 좋았다. 하이네켄 맥주를 작은 병으로 두병을 시켜놓고 운하를 바라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벽돌 건물들 사이로 작은 곤돌라나 혹은 유람선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문득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 개의 커다란 운하들과 그 사이사이로 연결된 160개의 작은 운하가 마치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는 암스테르담은 모든 것이 자유롭다.
“자, 우리들의 첫 여행지를 위하여 건배!”
“건배!”
아내와 나는 맥주잔을 마주치며 건배를 했다. 배들이 왔다 갔다 하는 운하 위 노천카페에서 마시는 맥주의 맛은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하이네켄 맥주 한잔에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았다.
“여보, 오늘 너무 힘들었지요?”
“저혈당 증세를 빼고는 다 좋았어요.”
“첫 도착지부터 길을 헤맨 데다 저혈당으로 당신을 힘들게 했으니 말이에요.”
“그건 여행을 떠나오지 않았더라도 늘 일어났던 일 아닌가요?”
“허지만 앞으로 갈길이 머니 건강에 저혈당에 각별히 유의를 해야 할 것 같소.”
"혈당체크를 좀 더 자주 하고 조심할게요."
운하 속으로 지는 가을 해를 바라보며 아내는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혈당으로 나에게 걱정을 끼쳐서 오히려 미안하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아내의 저혈당 증세가 늘 걱정이 되었다. 혈당을 하루에 5~6번 체크를 하고 혈당에 따라 인슐린을 조절하여 주사를 맞아도 아내의 혈당은 널뛰기를 하듯 종잡을 수 없이 오르내리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야 돌발사고가 일어나면 즉시 병원 응급실로 가면 되지만 낯선 나라에서는 아내에게 갑작스러운 변고가 일어나면 응급조치를 하기가 아무래도 수월하지는 않다.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나는 분위기를 바꿀 궁리를 했다.
“오늘 저녁은 뭐로 할까?”
“뭐 특별히 먹을 만한 것이 있나요?”
“여기 음식으로는 네덜란드 식 팬케이크가 유명하긴 한데. 아마 좀 달아서 당신에겐 잘 맞지 않을걸.”
“전 따끈한 국물이 있는 알큰한 라면을 먹고 싶은데요?”
“아니 벌써 한국음식이 먹고 싶다는 건가?”
“빵만 먹다 보니 임안이 개운치가 않아서요.”
“누가 말리는 사람 있겠소?”
호스텔로 돌아오자마자 아내는 부엌에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호스텔 부엌은 요리를 하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런 장소를 나는 좋아한다. 배낭에서 컵 라면 두 개, 햇반 1개를 들고 나오니 냄비에서는 벌써 물이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끓는 물에 라면을 넣고 슈퍼마켓에서 사 온 달걀 두 개를 풀어 넣으니 몇 분 만에 조리가 완성되었다.
“와! 이 라면!”
“냄새가 죽여주지요?”
“라면은 우리나라 라면이 최고야. 이 독특한 소스 맛은 아무도 흉내를 내지 못해!”
라면에 햇반을 섞어먹으니 맛이 그만이었다. 호스텔의 나무 테이블에는 여행자들이 남긴 낙서가 잔뜩 새겨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낙서를 새길까? 낙서가 새겨진 테이블에서 라면을 후르룩후르룩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키가 작은 동양인 아가씨가 소고기를 볶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프라이팬을 들고 왔다. 일본말로 뭐라고 하는데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앉아도 되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네, 앉아도 됩니다.”
“아, 미안합니다. 일본인 줄 알았어요.”
“천만에! 이웃 나라 사람을 만나서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저는 미찌꼬라고 해요. 오사카에 살고 있는데 북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이지요.”
“아, 그렇군요. 우리는 서울에서 오늘 아침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모래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떠납니다.”
“코펜하겐이요? 저는 그곳에서 어제 왔어요. 그런데 코펜하겐은 담배 연기밖에 기억이 나질 않아요. 사람들이 어찌나 담배를 피워 대든 지.”
“아하, 그래요? 베르겐은 어떻든가요?”
“베르겐이요? 거긴 비가 매일 퍼붓는 바람에 거의 밖을 나가지 못했어요. 북유럽을 여행하는 한 달 내내 비를 맞은 기억밖에 나지 않아요.”
미찌꼬는 소시지와 야채 그리고 소고기를 잔뜩 썰어 넣어 프라이팬을 앞에 두고 소시지를 입에 물며 프라이팬처럼 따끈따끈한 현지 여행정보를 전해주고 있었다. 호스텔이나 게스트 하우스에서 먼저 다녀온 여행자들 한 테 듣는 정보야말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가장 정확한 정보다. 체구는 작은 데 비해 식사량이 꽤나 많아 보였다. 아주 다부져 보이는 미찌꼬는 볶은 소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우리가 라면을 다 먹을 즈음 미찌꼬도 거의 냄비를 다 비워가고 있었다.
여행 중에 만난 일본 젊은 여성들은 대부분 혼자이다. 멕시코에서도 인도에서도 로키산맥에서도 큰 배낭을 걸머지고 홀로 여행을 하는 일본 여성들을 수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그와 반면에 일본 남자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고 다닌다. 홀로 배낭여행을 하는 일본 여성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강인하고 용감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도 최근 홀로 여행을 떠나는 용감한 여성들을 가끔 만나기는 하지만,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서 현지 한국 여행자들을 만나 소그룹을 이루어 다니고 있었다.
“미찌꼬, 다음 여행지는 어디지요?”
“동유럽을 돌아 포르투갈까지 갈 예정입니다.”
“꽤 긴 여행이 되겠군요.”
“6개월 정도 잡고 있어요.”
“힘들지 않은가요?”
“내가 좋아서 떠난 여행인데요. 육체적으로는 좀 힘들지만 잃었던 나를 조금씩 찾아가는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 충격을 크게 받는 일이 있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왔어요.”
그렇게 말을 하는 미찌꼬의 얼굴에 순간 어두운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 실연을 당했을까? 아니면 누군가를 상실했을까? 그러나 더 이상은 묻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여행으로 마음이 치유가 되어 간다고 하니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찌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머리가 온통 하얀 동양인이 손을 번쩍 들고 일본말로 인사를 하며 우리 자리로 다가왔다. 허름한 옷을 걸치고 배낭도 헤질 대로 헤진 낡은 배낭을 메고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볼이 불그스레하고 기운이 넘쳐 보였다. 나카무라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도 홀로 6개월간 유럽을 일주 여행을 하고 있는데 독일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영어가 무척 서툴렀다. 그래도 더듬거리며 자신의 여행담을 들려주었다. 나카무라는 프랑스를 거쳐 이태리를 지나 동유럽으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장기 여행자들은 대부분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아 식당에서 요리를 직접 해 먹는다. 그래야 유럽처럼 물가가 비싼 지역에서 장기간 여행을 할 수가 있다. 식당 테이블에 앉으면 테이블 차지와 서비스 차지가 붙어 가격은 두 배 세배로 비싸진다. 그런 식으로 여행을 하다간 금방 여행비용이 거덜 나고 만다. 그러므로 장기간 배낭여행 중에 우리들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는 컵라면을 알맹이와 소스만 분리를 해서 패킹을 하고 햇반을 추가로 준비를 해왔다. 짐이 다소 무거워졌지만 북유럽을 거치는 동안 아마 다 먹어치우게 될 것이다.
따뜻한 라면 국물을 마지막까지 다 마시고 나니 느긋한 포만감이 온몸을 감싸고돌며 졸음이 왔다. 집에서는 라면 국물을 다 마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해외로 여행을 떠나오면 국물 맛이 왜 이리 매콤하고 맛이 있는지!
20여 명의 남녀가 함께 혼숙을 하는 침실로 들어갔다. 초저녁이라 그런지 여행자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비어 있는 침대가 많았다. 아마 젊은 여행자들은 운하 속 어느 카페에서 하이네켄을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양의 젊은이들은 밤에 늦게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 내가 긴 하품을 하자 아내도 따라서 하품을 했다.
“피곤하지요? 내일을 위해서 푹 자요.”
“졸리긴 하는데 잠이 제대로 올지 모르겠네요.”
좁은 침대에 눕기 전에 아내는 주사기를 꺼내어 인슐린 주사를 스스로 맞았다. 당시에는 펜슬로 나오는 인슐린이 없어 일회용 주사기로 인슐린 병에서 인슐린을 흡입하여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것도 하루에 네 번을 맞아야 했다. 잠을 자기 전에 맞는 인슐린은 란투스라는 24시간 지속형 인슐린이다. 인슐린을 맞는 아내를 보자 다소 걱정도 되고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여보, 오늘 저혈당으로 힘들었을 텐데 괜찮소?”
“네, 괜찮아요. 이제 여행의 시작인데 관리를 잘해야지요. 내일은 어디를 가지요?”
“응, 내일은 풍차마을을 갈 거야. 그러니 오늘 밤 푹 자요.”
“우와, 풍차마을이요? 꼭 가고 싶은 곳이었는데. 내일 여행이 기대가 되네요!”
인슐린 주사기를 내려놓으며 아내가 미소를 지었다.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나도 울적한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역시 오길 잘했어.’ 여행에 대한 호기심이 아내를 치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계일주의 첫날밤을 20여 명이 남녀 혼숙으로 함께 자는 도미토리에서 아내가 과연 잠을 잘 잘 수 있을지 좀 걱정이 되었다. 아내는 1층 침대로 들어가고, 나는 2층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침대 층계 하나를 두고 우리는 오늘 밤 이산가족이 되는 거다. 아무리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이지만 여행 첫날밤을 누에고치처럼 자게 하자니 남편으로서 아내에게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방심은 금물이다. 세계일주를 완성할 때까지 정신 바짝 차리자.
“아내여, 미안하오! 신이시여, 아내를 돌보아 주소서. 이 세계일주 여행이 다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마음속으로 짧은 기도를 하고 나니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나는 성냥갑처럼 작은 침대에서 누에고치처럼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나는 등을 대면 그냥 잠에 드는 습성이 있다. 나는 자리에 눕자마자 곧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방심은 금물이다. 세계일주를 완성할 때까지 정신 바짝 차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