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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Mar 20. 2018


말날 장을 담그다

연천 콩으로 쓴 메주에 곰소 소금과 숭의전 약수를 부어 담근 장맛... 

연천 콩으로 쓴 메주에 곰소 소금과 숭의전 약수를 부어...

    

3 월 15일은 말날(음력 1월 28일)이다.  아랫집 현이 할머니가 전화가 왔다. 이번 말날을 놓치면 2월로 넘어가니 어서 와서 장을 담그라고. 그래서 말날 장을 담그기 위해 하와이에서 돌아오자 말자 부랴부랴 연천으로 왔다. 


"왜 하필이면 정월 말날 장을 담가요?"

"아따, 그건 우리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이랍니다. 굳이 사유를 밝히라면, 말날 장을 담그면 벌레나 안 꼬이고 장맛이 달고 좋아요. 또 콩은 말이 좋아하는 곡식인 데다 말의 핏빛처럼 장 빛깔이 진하고 맛이 달게 달다고 해요. 허지만 용날이나 뱀날 장을 담그면 구더기가 끓고 장맛이 없어요. 정월에 장을 담그면 소금을 덜 넣어도 되는, 장맛이 가장 좋아요. 2월이 넘어가면 남의 달이라 장맛이 없어 2월에 담근 장은 조상이 제사를 받지 않는답니다. 장맛이 변하면 그 집이 망한다고 하지 않아요."



하여간 현이 할머니의 말에 따라 매년 말날 장을 담그고 있다. 전에는 콩 농사를 지어  메주를 직접 띄워 담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어가니 콩 농사를 짓기도, 메주를 띄우기도 버겁다. 그래서 현이 할머니 집에서 매년 매주 두 말을 구해서 담는다. 현이 할머니 집에 도착하니 장 담그기의 달인인 현이 할메가 반가이 맞이한다.    

  

“매주 빛깔이 아주 좋아요. 매주를 잘 씻어 말려 놓았으니 손댈 것도 없고 소금을 풀어서 담그기만 하면 돼요. 지가 가서 좀 보아 드릴 게요.”

“아이고, 현이 할메 그래 주시면 너무 고맙지요.”     


현이 할메를 모시고 집으로 왔다. 넓은 다라를 깨끗이 씻어 숭의전 약수터에서 정성을 들여 길러온 약수를 조심스럽게 부었다. 예로부터 장 담그는 날은 외출을 삼가고, 장독에 금줄을 치거나 버선본을 거꾸로 붙여 부정을 방지하고, 장을 담근 후에도 삼칠일(21일) 동안은 상갓집을 가지 않고, 해산한 여인이나 달거리를 하는 여인 또는 잡인은 장광 근처에도 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만 우리 조상님들의 장 담그기는 각별히 신경을 썼다. 우리 조상님들은 1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를 김장과 장 담그기로 꼽고 있다. 김치 맛과 장맛이 좋으면 그 집안이 융성하고, 1년 반찬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신종만 사진작가가 부안 곰소에서 보내준 곰소 소금을 숭의전 약수에 서서히 풀어서 녹였다. 신 작가는 2005년 티베트 여행 때 라사에서 만난 인연이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부안에서 곰소염전(남선염업, 1946년 설립)을 경영하며 맛 좋은 소금을 생산하기로 유명했다. 간수가 쏙 빠진 달달한 소금으로 소금 맛이 좋아 미국인들도 주문을 하는 소금이다. 그런 소금을 신 작가는 매년 김장철에 1 가마 식 보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원래 장 담그기 하루 전에 소금을 풀어놓으면 좋은데, 시간이 없어 그러지를 못했다. 현이 할메가 달걀 한 개를 소금물에 넣고 서서히 저었다. 달걀이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큼 고개를 내밀고 소금물에 둥둥 떠 다녔다.   


   

금가락지는 항아리 천국이다. 아우가 수집한 항아리가 100개나 된다. 그중에서 때깔이 가장 좋은 항아리를 말끔하게 씻어서 매주를 담고, 소금물을 서서히 부었다. 소금물이 목에 차도록 붓고, 현이 할메의 지시대로 고추 다섯 개, 대추 다섯 개, 숯덩이 두 개를 넣고 뚜껑을 꽉 덮었다. 말날 장 담그기 완성을 하고 나니 컴컴해졌다.   


“소금 맛이 달달하고 아주 좋아요. 거기에  연천 콩으로 쓴 메주에 숭의전 약수를 부었으니 선생님네 금년 장맛은 아주 댓길이겠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다 현이 할메 덕분이지요.”      



장은 모든 맛의 으뜸이다. 장맛이 좋지 않으면 비록 채소나 맛있는 고기가 있어도 좋은 요리가 될 수 없다. 장맛이 사나우면 비록 진기하고 맛난 반찬일지라도 능히 맛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장은 식용뿐만 아니라 의료용으로도 이용해 왔다. 동의보감에는 “장은 모든 어육, 채소, 버섯이의 독을 지우고 또 열상과 화독을 다스리고, 메주가 식체를 지운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제 손이 없는 말날 장 담그기를 끝냈으니 반찬 걱정이 없다. 양지바른 곳에 푹 묵혀서 숙성이 되어 발효가 되면 메주는 건져 내어 된장으로, 그리고 곰소 소금으로 우려낸 물은 간장으로 사용하면 된다. 어쩐지 금년 장맛은 맛이 그만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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