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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Feb 03. 2019

23. 빵보다 예술을 사랑하는
러시아 사람들

러시아-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매력은 도시의 미관 못지않게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마음에 있다. 러시아인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곳에 와 보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독일과의 제2차 대전이 한창이었을 때 음악에 대한 일화 한 토막은 러시아인들이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독일 군에 의해 900일 동안 완전히 포위당한 시민들은 하루에 겨우 초코파이 두 개 분량의 빵 조각으로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 도시에는 쥐가 남아나지 않았고, 심지어는 인육까지 먹었다는 증언도 전해오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정기연주회를 보기 위해 수많은 시민들이 연주 홀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러시아인들이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은 과히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과연 빵보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콘서트 홀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날 나는 나타샤에게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한번 관람하고 싶으니 콘서트 연주회 티켓을 예약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녀는 일주일 이후까지 볼만한 발레나 콘서트는 거의 매진되어버려 좌석을 구할 수가 없다고 했다.


예술의 도시 페테르부르크에서 마린스키 극장이나 무소륵스키 오페라 극장 같은 유명한 곳에서 러시아 발레의 진수를 느껴보고,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가 연주하는 차이콥스키나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한 번쯤은 생음악으로 듣고 싶었다. 며칠이 지난 후에야 나타샤는 300 루블을 주고 콘서트 표를 어렵게 구했다고 했다. 콘서트홀은 ‘쇼스타코비치 기념 대공연장'으로 차이콥스키가 사망하기 직전에 직접 지휘봉을 지고의 유명한 교향곡 6번 '비창'을 초연한 유명한 대공연장이다.     


그런데 그날은 하필이면 일본의 필하모니 교향악단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30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 공연을 하는 날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세계적인 콘서트홀을 가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을 해야 했다.  콘서트홀은 러시아 귀족들의 무도장과 사교장답게 매우 화려했다. 호화로운 샨데리아와 무대장치 또한 매우 돋보였다. 큰 북을 치며 공연을 하는 일본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러시아 관객들로부터 대호평을 받았다. 러시아인들의 콘서트 관람 태도는 매우 진지했다. 연주가 끝날 때마다 그들은 “브라보!”를 외치며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 주었다.     


콘서트 홀은 빵보다 예술을 사랑하는 러시인들로 늘 붐비고 있다.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가야 할 시간이다. 밤늦게 우리는 모스크바로 가는 야간 기차를 타기 위해 나타샤의 집을 나섰다. 떠나는 우리들을 환송하기라도 하듯 아침부터 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나타샤와 유학생 박 군이 우리들의 작은 가방을 들고 버스정류장까지 환송을 나와 주었다. 


“모스크바 스카야 역에서 내리셔야 합니다.”

“모스크바 스카야 역, 기억하겠습니다. 나타샤, 그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두 분이 부러워요. 아마 세계일주가 끝나면 사모님의 병이 완전히 나으실 거예요. 두 분을 위해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들도 따님의 음악교육이 성공하길 기원하겠습니다. 한국에 오시면 꼭 전화를 주세요.”

"네, 전화드릴게요. 안녕히 가세요."


나타샤와 박 군은 아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이별의 인사를 했다. 


“아픈 사모님과 함께 여행을 다시시는 선생님을 보면서 유학을 떠나온 저 역시 많은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고맙소. 박 군도 건강하고 뜻하는 일 이루길 바라요.”


눈 내리는 날의 이별. 나타샤와 박 군의 입에 하얀 입김이 서렸다. 정들었던 나타샤와 박 군, 그리고 나타샤의 오래된  아파트도 멀어져 갔다. 머나먼 동토의 땅 러시아에서 민박집까지 운영하여 딸의 음악교육을 위해 혼신을 다하는 나타샤! 그녀는 현대판 신사임당 같은 자랑스러운 한국의 여인이었다. 점점 작아져 가는 나탸샤를 바라보며 나는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가 떠올랐다. "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는 나그네라고 하지만 이별의 순간은 언제나 가슴 뭉클했다. 우리를 태운 147번 버스는 거리를 빙빙 돌더니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비추이는 네바 강을 지나갔다. 토끼 섬의 조명이 화려하게 네바 강을 수놓고 있었다.


“그동안 정들었던 무대를 지나가는군요.”

“찬란하면서도 우울한 도시야. 뭔가를 생각게 하는 그런 도시….”


네바 강이 도도히 흐르는 페테르부르크는 그 찬란한 문화와 역사가 강열한 인상을 심어주면서도 무언가 우수를 느끼게 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그렇고 회색빛 하늘이 그랬다. 그러나 거리의 벤치와 지하철, 버스에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러시아의 희망을 보는 것 같았다. 멀리 이삭 성당이 조명을 받으며 그림처럼 다가왔다. 화려한 네프스키 대로를 지나 바티칸 궁전을 방불케 하는 카잔 성당의 회랑을 지나갔다. 


“모스크바스키 바그잘(모스크바 역입니다).” 


차장이 모스크바 역에 다 왔으니 내리라고 신호를 했다. 배낭을 서둘러 메고 거리에 내리니 방향 감각이 없었다. 길을 걷는 여인에게 포스트잇에 적힌 발음을 더듬거리며 모스크바 역을 물어본다. 


“모스크스키 바그잘 그제(모스크바 역이 어디지요?)?”

“바로 저기예요.”


러시아에서는 가급적 여자에게 길을 묻는 게 좋다. 갱을 한번 만나 본 나로서는 주의를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모스크바 역 광장으로 들어가니 넓은 광장 한가운데 동상이 서 있었다. 서울에는 ‘서울역’이 있고 목포에는 ‘목포역’이 있지만, 페테르부르크에는 ‘페테르부르크 역’이 없고, 또한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역’이 없다. 러시아는 도착지의 이름을 출발지에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스크바로 가려면 ‘모스크바 역’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헬싱키에서 기차를 타고 페테르부르크에 내린 역은 ‘핀란드 역’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역


기차 여행은 추억을 되살린다. 기차에 오르니 내가 6년 동안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녔던 내 고향산천 목포가 떠올랐다. 그 기차 길에는 시와 낭만과 소년의 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목포에서 이 기차를 타고 거꾸로 시베리아 철도를 횡단하여 페테르부르크까지 여행을 하는 희망을 그려보았다. 


“여보, 우리 먼 훗날 목포 항구에서 기차를 타고 페테르부르크까지 기차 여행을 와요.”

“우리 생애에 그런 날이 올까요?”

"나는 우리들의 기찻길 인연이 반드시 이어지리라고 믿어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요.”


우리는 목포에서 기찻길 인연으로 만났다. 그 기찻길 인연이 결혼으로 이어졌고, 세계일주 여행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내 생애에 목포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 페테르부르크까지 여행을 올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목포에서 38선을 지나 평양으로, 평양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그리고 바이칼 호수를 거쳐 모스크바를 지나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이어지는 희망여행을 지금도 꿈꾸고 있다. 


꿈은 계속 꾸다가 보면 꿈은 이루어진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라라의 테마’가 흐르는 ‘닥터 지바고’의 무대를 지나 기차여행을 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드디어 기차가 움직였다. 빵보다 예술을 사랑하는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다시 오는 그 날이 올 때까지 페테르부르크여, 안녕!   

        

모스크바로 가는 야간열차를 타며


★★★지금까지도 나는 내 고향 목포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지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꿈을 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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