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와 부엽토
3월에 심은 상추들이 정말 잘 커 주었다. 덕분에 나는 매일 3끼마다 싱싱한 상추를 뜯어먹는다. 워낙 야채를 좋아하는 까닭이다. 아침에는 채마밭에 가서 이슬에 젖은 상추 몇 잎을 따다가 식빵에 넣어 먹는다. 빵 속에 들어있는 상추를 씹는 맛이 아삭아삭하고 고소하다. 점심과 저녁은 말할 것도 없이 상추에 쌈장과 밥을 넣어 입이 터져라 하고 움질움질 씹어 먹는다. 그러면서 나는 늘 자연과 상추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오늘(5월 18일)은 심장이식 환자들의 모임인 ‘다시 뛰는 심장으로’(이하 닷뜀) 캠프에 1박 2일 동안 참여하는 날이다. 심장이식을 받은 아내 덕분에 심장이식 환자들과 10년이 넘게 교류를 하고 있다. 환자들이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커뮤니티인 ‘밴드’에 들어가면 곧 소식을 듣고 전할 수 있다.
아내는 오늘 아침 채마밭에 있는 상추를 모조리 따라고 했다. 땃뜀회원들에게 싱싱한 상추를 먹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오늘 모임은 80여 명 정도가 온다고 한다. 나는 5시에 일어나 큰 광주리를 들고 채마밭으로 갔다. 여명이 동트는 아침은 매우 시적이다. 임진강이 바라보이는 굼굴산 기슭에 위치한 금가락지는 아침마다 새들이 날아와 노래를 불러준다. 싱그러운 5월의 신록에 둘러싸인 금가락지의 아침은 마침 낙원을 연상케 한다.
상추들은 마치 오늘을 위해 잘 자라준 것처럼 보인다. 나는 로제트 모양을 하고 있는 상추들이 아름답게만 보인다. 모든 식물들은 대부분 로제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장미처럼 잎이 동그랗게 밀집되어 전체적으로 둥근 원을 그리고 있는 형태를 로제트라고 한다. 청상추와 로메인 상추는 로제트 모양으로 속이 꽉 차 있다. 반면에 양상추는 등을 구부리고 공 모양으로 잎을 둥글게 오므리고 있다. 반면에 케일은 잎을 쭉 펴서 하늘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선하고 아름다운 상추 밑에는 썩은 부엽토가 밑거름이 되어주고 있다. 나는 매년 금가락지에 떨어진 낙엽을 모으고 풀들을 잘라 퇴비를 만든다. 퇴비는 잘 썩어서 부엽토가 된다. 상추를 심기 전에 이 부엽토를 흙에 넣어 잘 섞어준다. 거기에다 참기름 집에서 깻묵을 구해와 푹 썩혀서 흙속에 함께 넣어준다. 그리고 보름쯤 지나 부엽토로 자양분을 듬뿍 머금고 있는 흙속에 상추 모종을 심는다. 보름 후에 심는 것은 가스가 빠져나간 다음에 심어야 상추들의 뿌리가 다치지 않는다.
사실 겉모양은 아름답지만 상추 뿌리를 감싸고 있는 흙은 더러운 부엽토가 거름이 되어주고 있다. 불구부정 (不垢不淨)! 더럽고 깨끗한 것이 어디 따로 있는가? 연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어나듯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연기 생멸하는 실체가 없는(空) 것이므로 현실에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차별된 모습은 실체가 아니다. 아름다운 상추 밑에 숨겨진 더러운 부엽토가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부엽토는 상추보다 더 아름다운 흙속에 숨겨진 검은 보석이다. 과연 이 상추들을 위해서 나는 한 줌의 부엽토가 되어 줄 수 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상추를 한 잎 한 잎 뜯어냈다. 풋풋한 냄새가 향기롭다. 로제트 모양을 하고 있는 상추 잎을 옆으로 살짝 비틀면 똑하고 떨어진다. 그 소리는 하나의 짧은 음표다. 상추 잎을 비틀 때마다 똑똑 소리를 내며 몸체에서 기꺼이 떨어져 나가는 상추 잎은 청정하다. 인간을 위에 자신이 팔을 기꺼이 내놓는 상추들이 대견하기만 하다.
상추를 다 뜯어내니 무려 세 광주리나 되었다. 나는 상추 잎을 한 잎 한 잎 뜯어내고, 아내는 그 상추들을 한 잎 한 잎 깨끗하게 씻어냈다. 아내는 무려 세 번 이상 상추 잎을 물에 헹구며 깨끗하게 씻어낸다. 그리고 씻어낸 상추는 물 끼를 쪽 빼서 비닐봉지에 담아 큰 박스에 넣었다.
상추를 싱싱하고 오래도록 보관하는 방법은 깨끗하게 씻은 상추를 큰 물기만 털어내고 촉촉한 상태에서 꼭지가 아래로 향하게 하여 지퍼 백이나 비닐봉지에 넣어 냉장고에 보관한다. 꼭지를 아래로 향하게 하는 것은 상추가 자라나는 형태를 취하게 하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보관하면 일주일이 지나도 거의 원형 그대로 싱싱한 상추를 먹을 수 있다.
아내와 나는 무려 3시 간 동안이나 이 작업을 했다. 작업을 끝내고 오늘 아침에도 식빵에 상추를 넣어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그런데 이 상추를 어떻게 싱싱하게 운반을 하지? 닷뜀 회원들은 광릉수목원에서 오후 1시 반에 모여 5시까지 산책을 하고 숙소로 간다고 한다. 열기가 가득 차는 자동차 안에 넣어둔 상추가 물러질게 아닐까? 세 박스의 상추를 트렁크에 넣지 않고 뒷좌석에 실었다. 트렁크는 공기가 통하지 않고 에어컨이 닿지 않아 덥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는 그런 걱정을 하며 차를 광릉으로 몰고 갔다. 다행히 날씨가 받쳐 주었다. 하늘엔 구름이 드리워주고 숲 속이라 그런지 날씨가 제법 선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