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인아씨의 돈공부
휴직자일 때와 퇴직자일 때의 마음이 참 달랐다. 통장에 꼬박꼬박 꽂히는 월급이 없다는 것은 매 한 가지였지만 소속이 있을 때의 안정감이 사라지고 나니 인아씨 마음 한켠에는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 하는 걱정이 슬며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돈을 벌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 몹시 불편했다. 엄마로서 또 아내이자 주부로서 사는 거야 당연하다 쳐도 전업주부로만 살고 싶지는 않았다.
퇴직을 결심할 때만 해도 막연히 퇴직금과 위로금으로 투자를 해 볼 수 있겠다, 많지는 않아도 매달 조금씩 이익을 만들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내야지 했었는데 정작 실천에 옮긴 건 퇴직. 그것뿐이었기에 인아씨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투자도 잘하고 자신의 커리어도 잘 쌓아가고 있는 남편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나도 이제 주식 투자 공부 좀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주식?”
“퇴직하고 나니까 오히려 편하게 놀고먹고 그렇게가 안되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런 걱정하지 말라니까. 나는 당신도 하고 싶은 거 했으면 좋겠는데 이제는.”
“나 Fire족 하고 싶은데 지금은 그냥 Fired 된 족인 것 같아. 딱히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그 말 너무 웃긴데 하하하, 웃어서 미안. 암튼 당신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주식 조금씩 해보는 건 좋지. 난 주식 투자하면 내내 신경 쓰여서 딴 걸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좀 하다가 그만뒀어. 부동산이 나하고 잘 맞아. 당신은 나보다 강심장이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
고등학교 때 공부는 좀 했다. 유명한 학군지 학교는 아니었지만 혼자 공부해서 서울 상위권 대학에 입학할 정도의 실력이었으니 공부에는 나름 자신 있었다. 무려 20여 년 전 이야기이지만 인아씨는 새로운 공부에 의욕적으로 몰입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간단한 집안일을 하고 나면 도서관으로 출근을 했다. 아이들 하교시간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경제 신문을 읽고, 투자 책을 읽고, 실제로 적은 돈으로 조금씩 연습도 해보았다.
우량주, PER 저평가주, 배당주 등을 골고루 직접 투자해 보며 어떤 날은 치킨값을 벌어보고, 어떤 날은 한우 고기 값도 벌었다. 물론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심장의 쫄깃함을 맛본 날도 몇 번 있었다.
‘이거 심장이 두근거려서 큰돈은 투자 못하겠어. 나름 강심장인 줄 알았는데 눈앞에서 돈이 불어났다 사라졌다 하니까 진짜 미치겠네. ’
짧지 않은 기간 공부하고 투자하며 인아씨가 내린 결론이었다. 왜 고수들이 단타 대신 장기투자를 그렇게 추천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묻어두고 잊어버리기!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냐고. 주식투자를 안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외식 한 두 번 할 수 있는 수준의 용돈 벌이를 목표로 하니 훨씬 홀가분하게, 또 부담 없이 투자를 이어갈 수 있었다. 최소한 코로나 때 -40%를 찍던 파란 숫자들은 다 사라졌으니 나쁘지 않았다.
도서관으로 출근해 자리를 잡으면 맞은편 책상에 인아씨처럼 매일 똑같이 출근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나이는 60대 이상으로 보였다. 우연히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정수기 앞에서 물을 마시는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도서관에서 자주 보니 서로 얼굴을 알기는 해도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마주치니 인사를 안 할 수가 없어, 인아씨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나오셨네요.”
“아 네. 나랑 같이 도서관에 출근하는 분이구나.”
“하하하, 네 매일 봤는데 인사는 처음 드리네요.”
알고 보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었다. 동네 주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다음부터는 도서관에는 언제 오는지, 아이들은 몇 살인지, 마트는 어디가 좋다든지, 커피는 어느 집이 맛있다든지 하는 온갖 주제의 대화가 술술 이어졌다. 한국 중년 어머니들의 친화력에 감탄하며 인아씨도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는 주식공부도 하고 책도 읽으러 도서관에 온다고 했더니 아주머니는 재테크로 경매를 하고 있다고 했다. 매일 도서관에서 경매 공부하고 그걸로 돈 많이 벌었다며 은근슬쩍 자랑도 이어져 나왔다. 그걸로 아이들 학원비 벌고, 좋은 대학 잘 보냈다면서. 요즘 경매는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졌지만 노후에 자식들 짐 안되려고 꾸준히 공부하신다고 했다.
“어머! 경매요?”
눈이 반짝임과 동시에 마음에도 퐁당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응 자기도 한번 해봐. 똘똘하게 생긴 게 잘할 것 같아.”
“저요? 아 제가 돈 버는 재주가 별로 없긴 한데, 공부야 해 볼 수 있죠. 근데 진짜 멋지시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당당함, 자신감이 열정 가득한 눈과 환한 얼굴빛으로 드러나는 듯했다. 그분의 배경이나 환경은 알 수 없었지만 나이 예순이 다되어도 꾸준히 투자를 하며 부지런히 공부하는 모습에 인아씨는 약간의 충격과 자극을 동시에 받았다.
책과 유튜브에는 없는 게 없었다. 책을 보다 모르는 게 있으면 유튜브에 검색을 했다. 해당 내용을 설명해 놓은 영상들이 수백 아니 수천 개씩 올라와 있었고, 차근차근히 반복해서 보다 보면 어려운 경매 용어부터, 진행되는 과정까지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법원경매사이트, 유료경매정보사이트도 수시로 들락거리며 괜찮아 보이는 물건이 나오면 퇴근하고 온 대명 씨를 붙잡고 이런 건물은 어떤지, 이 지역은 어떤지 묻고, 그 동네 주변 시세도 같이 찾아보며 서툴지만 차근차근 배워갔다. 새로운 세상을 배워가는 재미에 또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에 인아씨는 퇴사 후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입찰금액을 결정하는 수학적 공식이나 과학적 근거는 없었다. 최저입찰가를 기준으로 그전에 몇 번이나 유찰되었는지, 근저당이나 채권 여부, 물건 자체에 숨은 이슈나 하자는 없는지, 명도나 유치권 처리에 어려움은 없는지 온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을 나름 제대로 공부하고 나서도, 결국에는 감으로 입찰금액을 정해야 하는 게 참 어려웠다.
몇 번에 걸쳐 모의입찰을 시도해 본 후 드디어! 두근두근! 첫 실전 입찰이었다.
인천지방법원 앞.
‘인천은 공항 말고 와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나도 대단해. 혼자서 이렇게 경매입찰에 와보다니!’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에 인아씨는 스스로를 토닥이며 연신 깊은숨을 내쉬었다. 후~ 후~
아이들 학교 보내고 부랴부랴 왔는데도 10시.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기에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법원 안으로 들어섰다. 입찰용지를 받아 들고 조심조심, 한 땀 한 땀 그리고 천천히 미리 계획한 금액을 써 내려갔다. 동그라미 하나를 더 쓴다거나 틀리게 써서 고쳐 쓰면 낙찰을 받아도 무효처리가 된다기에 괜스레 손까지 떨렸다.
입찰마감시간은 11시 20분. 여유 있게 입찰용지를 제출하고 난 인아씨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차분히 입찰한 물건의 순서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같이 오자고 할걸. 엄청 떨리네. 만약에 진짜로 입찰을 받으면 어쩌지?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되더라……’
머릿속으로 입찰받은 후에 할 일 들을 순서대로 착착 그려보며, 떨리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낙찰금액은…”
드디어 발표다!
첫 경매의 경험은 짜릿했다. 마치 처음 수영을 배우고 구명조끼나 킥판 같은 보조부력장치의 도움 없이 혼자 물속으로 뛰어드는 기분. 두렵지만 물속에 몸을 맡기고 긴장을 풀면 부웅하고 몸이 물 위로 떠오를 때, 신기하면서도 내가 해냈다는 기특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그런 기분말이다. 비록 낙찰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 긴장감? 이 꽤 신선했다.
패찰을 여러 번 경험한 후에야 드디어 인아씨도 작은 단독주택을 하나 낙찰받을 수 있었다. 되팔아 수익을 만들기까지 예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걸렸지만 그래도 월급 외에 처음 스스로 벌어본 돈에 인아씨는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는 듯했다. 물건지에도 가봐야 하고, 확인해 봐야 할 사항도 많아서 자주 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관심 있는 동네 위주로 올라오는 물건들이 투자가능한 금액 내에 있다면 권리분석을 하며, 꾸준히 투자공부를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