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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챌린 Oct 17. 2024

희망퇴직 신청서 따위

18. 파이어족으로 살고 싶다

대명 씨는 늘 이른 아침에 출근을 했다. 인아씨는 아이들 아침밥을 해 먹이고, 학교를 보냈다. 뒤돌아서면 빨래 바구니에는 어젯밤부터 식구들이 던져놓은 빨래가 가득. 흰색과 짙은 색을 구분해 세탁기를 먼저 돌려놓고,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와서, 행주를 빨아 널어놓으면 잠시 숨 돌릴 시간이 생긴다. 따뜻한 물을 끓여 커피 한 잔을 내렸다. 피어오르는 커피 향을 맡으며 겨우 자리에 앉았다. 오전 아홉 시 반, 이제는 이 생활도 너무 익숙했다. 


오전 일곱 시, 일어나 샤워를 간단히 하고 후다닥 출근 준비를 마치면 아이들을 깨울 시간. 출근길에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맡겨야 하니 8시 전에는 집에서 나서야 한다. 돌 지나고부터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첫째는 이제는 익숙해서인지 아침에 일찍 잘 일어나 주었다.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둘째를 왼쪽 어깨에 들쳐 업고, 오른손으로 첫째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집을 나섰었다. 


퇴근을 하고 저녁 일곱 시 반쯤 집에 오면 저녁을 먹고, 겨우겨우 설거지와 빨래를 하고, 아이들과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곤 잠잘 시간.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인아씨는 커피를 마시며 문득 휴직 전 자신의 일상을 떠올려 보았다. 정말 하루하루 그렇게 흘러갔었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며칠째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 단어를 검색창에 입력하고 엔터키를 눌러보았다. 가장 먼저 단어의 뜻이 나왔다. 


파이어족(Fire족)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빨리 은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 


연이어 검색되어 나온 블로그, 뉴스 등에는 얼마가 있어야 파이어족으로 살 수 있는가, 파이어족이 되기 위해 MZ이 절약하며 사는 법, 파이어족을 위한 재테크, 절대 파이어족 되지 마라 등의 제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써놓은 글이 있었다. 


‘내가 일을 하지 않아도 매월 정기적으로 돈이 들어오게 만들어 놓고, 하고 싶은 일 하며 여유 있는 삶을 산다?’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당연히 복직해서 다시 회사를 다닌다고 생각했다. 대기업이었고, 적성에 맞는 업무를 하고 있었으니 그 두 가지만으로도 떠나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아니 꼭 붙어 있는 게 보다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선택으로 보였다. 그러나 며칠 전 회사에서 보내온 복직 안내 메일을 본 이후로 인아씨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복직 안내가이드와 함께 딸려온 첨부파일에 희망퇴직 신청서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잘못 보냈나 의심을 했다. 아직 나이도 젊고, 한 해 빼고는 업무 평가도 높았는데? 에이 아니겠지. 괜히 속상한 마음에 휴직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가? 회사 사정이 안 좋은가? 이거 진짜 나한테 보낸 거면 너무 서운한데 하며 여기저기 회사 동기들한테 요즘 회사 사정이 어떤지 연락도 해 보았다.


확실히 하고 싶어 인사팀에도 이메일을 보냈더니 인력감축을 진행하고 있는 건 맞으나, 박인아 씨는 퇴직을 희망하지 않으면 복직이 가능하다는 아주 사무적인 답변을 받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기분이 더럽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거다. 이런 경우 퇴직을 하지 않은 권리가 있는 건 노동법상 당연한 것이었지만 회사입장에서는 어쨌든 내가 대상자였던 것, 그것이 기분 나빴다. 


첫째 출산 후 받았던 고과 평가 때도 결과가 부당하다고 느꼈지만 모두가 돌아가며 하위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참았다. 같은 팀이니까.


해외지역전문가에 선발되어 다녀온 남자 동기는 벌써 서너 명이었는데 여자 동기는 없었다. 지금은 과장급이 되었기에 해외 주재원 기회도 많았은데 10명이 파견된다면 그중에 하나 여자가 있을까 말까 했다. 한 번도 누락 없이 과장, 차장, 부장으로 올라간 여자 선배는 내가 알기로 딱 1명이었다.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이었지만, 회사 생활이나 업무 자체가 차별적이진 않았지만 결혼한 여자라서 육아와 가정이 있는 덕분에 배려인지 배제인지를 당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회사를 참 좋아했다.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던 회사에서 돈 좀 얹어줄 테니 나가줄래? 아니면 말고 라니. 팀 안에서 희망 퇴직자 예비 리스트를 부서장에게 받지 않는 이상 대상자 명단에 포함될 수가 없기에 늘 믿어왔던 부서장에 대한 배신감도 컸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인아씨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화가 난다고 그냥 희망퇴직을 신청해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연봉이 얼만데, 의료비나 교육비 지원 같은 복지혜택은 또 어떻고. 한편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복직 날짜를 계산해 가며, 이후의 일상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아침시간 등교와 출근은 그렇다 쳐도,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이 학원 뺑뺑이를 돌거나 보호자 없이 집에 있어야 했다. 복직을 한다면 도와줄 사람을 구해야 했다. 


이 참에 확 퇴직해? 희망퇴직 대상자가 복직을 하면 어떤 분위기가 될까? 내 업무를 다시 할 수 있을까? 평가는 제대로 주려나? 버티고 버텨 그냥 똑같이 일하다가 또 그렇게 10년이 흘러가겠지. 아니 전과 같이 할 수나 있음 다행이지. 가시방석에 앉아서 눈치만 보게 되는 거 아닌지 몰라.


내가 너무 오래 쉬었나, 남들 다 그렇게 맞벌이하며 사는데 퇴사를 생각하다니! 무시무시한 물가에 한 달 생활비 쓰고 나면 남는 것도 별로 없는 급여지만 그래도 월급이 따박따박 들어오는 게 어디야? 당연히 복직해야지.


아이들 챙기고, 집안일하고, 시간 날 때 책 보며, 블로그에 가끔 글 쓰던 시간이 싫지는 않았어. 여전히 육아와 살림은 어렵지만 아휴, 그래도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사람을 구한다고 해도 과연 믿고 쓸 수 있을까?


충분한 돈이 있다면 나는 회사에 다시 돌아갈 것인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좀 찾아볼까?


파이어족으로 살면 좋겠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을 때 하고, 휴직, 퇴직 걱정도 없고.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지만, 인아씨는 이내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자존심 상해도 어쩌랴. 그래도 복직하는 게 맞지.


‘정신 차리자, 박인아!’


“벌써 그렇게 됐어? 세 달 남았다고?.”


“아니 두 달이라고! 너무 느긋하게 있었어. 전업주부로 살았더니 얘들 일은 챙겨도 정작 내 일은 미리미리 신경을 못썼네. 시간이 많지 않아. 일단 아이들 하교 후에 다닐 학원 몇 군데 다시 세팅해야 하고, 자기랑 나랑 출퇴근 스케줄도 한번 정리해 보자.”


“복직하고 싶어? 희망퇴직 신청서도 왔다며?”


“당연히 해야지. 그동안 우리가 투자를 한다고 했어도 매월 들어오는 돈은 아직 얼마 없잖아. 상가랑 원룸 건물 월세도 대출 이자내고 나면 남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거 알아 나도. 그 덕분에 어쨌든 휴직기간 동안 마음 편하게 있었지만 말이야. 그리고 부동산 시세 차익이라도 노리려면 아파트든 뭐든 팔아야 남는 건데 요즘 같은 시기에 양도세 내고 나면 그 차익도 생각보다 크지 않다며.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


“일단 돈 생각은 말고 당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잘 생각해 봐.”


“오~ 뭐야? 설마 나 일 안 하고 놀아도 되는 거야?”


“난 사실, 그동안 당신이 아이들 전담으로 키워 준 덕분에 편하게 회사 생활하고 부동산 투자하러 다니고 임장도 다니고 하고 싶은 거 많이 했어. 진짜 고마웠어. 돈 때문에 복직하는 거면 다시 한번 생각해 봐도 괜찮다는 거지. 당신이 회사 복직 안 해도 우리 식구 먹고사는데 문제없어. 그 정도는."


“진짜? 우리 그 정도는 된다고? 말만 들어도 기분 좋은데?! 우리 남편 멋지다! 그런데 그냥 먹고사는 문제야 어찌어찌 해결한다고 쳐도 앞으로는 아이들한테 점점 돈이 많이 들 거야. 집도 큰 데로 가야 아이들 방도 하나씩 줄 수 있고, 나는 내 집에서 살고 싶어.”


“내가 좀 더 열심히 해서 당신 월급만큼 나오는 파이프라인 하나 만들어야겠다! 마음에 드는 동네에 마음에 드는 집을 자가로 사는 건 조금만 더 기다려주라. 그리고 진짜로 돈 때문이라면 복직 안 해도 괜찮아. 돈 버는 방법은 많으니까. 


난 그냥 당신이 돈 때문에 회사에 돌아가는 게 아니었으면 해. 물론 회사 생활 잘했던 것도 알고, 회사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지만, 희망퇴직 신청서가 왔다니 앞으로 회사에 돌아가도 어떤 분위기 일지... 그게 많이 걱정되거든.


나 김대명이야! 믿어도 된다고! 아무튼 퇴직해도 복직해도 다 괜찮으니까 당신이 결정하는 대로 따를게. ”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우리 남편 진짜 최고다! 나 그럼 돈 생각 안 하고 고민해 본다~ 그런데  퇴직하면 신용대출 바로 갚아야 될걸?”


“앗! 얼마였더라? 5천? 그건 좀 시급한 문젠데?”


“두 달 남았어. 아주 시급해. 내 통장에는 생활비 쓰고 남은 돈 밖에 없어~.”


서점에 들러 아이들이 부탁한 흔한 남매 과학탐험대 시리즈와 카카오프렌즈 세계여행 시리즈를 구입한 인아씨는 베스트셀러 코너를 둘러보았다. 소설, 자기 계발서, 경제서, 어학, 인문학 책들이 골고루 진열되어 있었다. 경제 쪽 매대에는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주변 회사원들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살짝 틈을 비집고 들어가 책 제목들을 살펴보니 비트코인 투자법, EFT와 미국주식, 배당주에 이어 꼬마빌딩, 아파트, 재개발 재건축, 경매 등 주식과 부동산 관련 재테크 책들이 즐비했다. 유튜브 수익화, 블로그로 월 천만 원 벌기, 스마트스토어, 해외구매대행으로 두 번 월급 받는다 등의 책들도 수두룩 했다. 돈 버는 방법은 많다는 남편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주식투자와 비트코인까지는 알겠는데 세상에 돈 버는 방법이 이렇게 많았나? 인아씨는 핸드폰 카메라로 몇 가지 책 제목을 사진에 담았다. 


‘복직과 퇴직만이 문제가 아니었어. 내가 애들 키운다고, 휴직했다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신경 쓰지 않고 사는 바보였어. 퇴직이든 파이어족이든 뭐든 선택하려면 내가 충분한 돈이 있어야 되는 거였는데. 돈 잔뜩 벌어서 기분 나쁜 희망퇴직 신청서 따위 그냥 확 제출해 버리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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