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강남에서 새 출발
“오~저기 길 따라서 멀리까지 잘 보인다.”
“뷰가 정말 도시적이다.”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깥풍경이 조금 생경하다.
공원과 주변 녹지가 잘 가꾸어져 있는 신도시 아파트 1층에 거주했던 인아씨 가족은 강남으로 오면서 19층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푸릇푸릇 초록의 바깥 풍경이 익숙했던 가족들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낯섦을 느꼈다.
“엄마, 우리 이제 여기서 사는 거야?”
“응. 새로 이사 온 집에서도 우리 가족 모두 같이 파이팅 해보자.”
“나는 이사 오자고 한 적이 없는데 왜 온 거야?”
낯을 많이 가리는 둘째는 새 집이 아직 많이 어색한가 보다.
“음. 서울에서, 새로운 곳에서 살아보려고 왔지. 옛날부터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가고 사람은 서울로 가라는 말이 있거든.”
“학교도 바뀌는 거야? 전에 있던 학교가 좋은데.”
“응 새로운 학교도 한번 재미있게 다녀보자. 아직 방학이니까 동네 여기저기 다니면서 뭐 있나 구경하고, 맛있는 떡볶이 집이랑 쌀국숫집은 어디 있나도 보고, 한강도 가까우니 자전거 타고 나가보고, 어때?"
인아씨는 새 집이 아직 어리둥절한 아이들에게 흥미를 끌만한 일을 찾아보려고 일부러 더 밝게 말을 건넸다.
새로운 시작이다 이곳 강남에서. 하지만 아직은 쓸쓸하고 앙상한 회색빛 풍경만 가득한 이곳이, 차갑게 불어오는 칼바람이, 새로운 시작을 반겨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속으로 인아씨는 생각했다. 겨울은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기 어려운 계절인 것 같다고. 얼른 파릇파릇한 초록 이파리들이 커다란 나뭇가지에 피어올랐으면 좋겠다고.
문득 인아씨는 자신의 대학 입학 때가 떠올랐다. 대학은 무조건 서울로 갈 거라고, 꼭 보내줘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던 철없던 그때. 아직은 어린 딸을 옆에 두고 싶었던 어머니는 딱 한번 물었다. “그냥 대구에서 학교 다니는 건 어때?”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인아씨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만 모든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는 합격자 발표가 나자마자, 서울로 이사를 준비했다. 추운 겨울이면 어떻고, 좋은 집이 아니면 어떠랴. 대학을 간다는 것, 서울로 이사를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 들뜨고 설레던 20살의 인아씨였다. 아마 처음 서울에 왔던 그때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학교는 어떨지, 새로 만날 친구는 어떨지, 혼자 사는 삶은 어떨지 마냥 신이 났었다.
딸 혼자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영 불안했던 어머니는 인아씨를 서울 동생네가 가지고 있던 작은 아파트에서 살도록 했다. 근처에 이모네가 있으니 가끔 밥이라도 얻어먹으라고, 무슨 일 있으면 이모한테 도움받으라고, 입학할 학교와는 거리가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살도록 했다. 재건축이 예정되어 있던 잠실의 큰 아파트 단지. 아파트라고 했지만, 거실 겸 부엌에 작은 방이 두 개 붙어 있고, 화장실이 하나 있는 구조. 대청마루아래에서 신발을 벗고 한 계단 올라서야 집 안이 시작되는 예전 한옥집처럼 현관과 거실의 단차가 굉장히 높은 집이었다. 160 초반의 키를 가진 인아씨였지만 낮은 천장 높이 때문에 집 안에서 움직일 때는 어디 부딪치지 않을까 걱정되는 내부. 아파트 밖의 나무들은 자신의 크기를 뽐내듯 가지를 위로 아래로 쭉쭉 뻗어냈고, 오래된 수명만큼 크기도 커서 밤늦게 집에 돌아올 때면 은근히 축 쳐진 나뭇가지들이 무서워 후다닥 뛰어서 집에 들어가곤 했던, 한눈에 봐도 조만간 필히 재건축이 되어야 하는 아파트였다.
‘그러고 보니 내 서울 생활의 시작은 그 아파트였구나. 그렇게 보면 나름 성공했네. 내 힘으로 아니 우리 가족의 힘으로 다시 서울, 그것도 강남으로 왔으니까. 이제 여기 살면서 진짜 내 집 하나 마련하면 좋겠다.’
대명 씨는 이사 온 이후로 회사 업무가 계속 바빴다. 하필 프로젝트 마감 일정이 앞당겨져서 팀원들 모두 야근을 밥먹듯이 하고 있는 중이었고, 이사 당일날 하루 휴가 내는 것조차 눈치가 보일 정도였으니까.
저가 포장이사를 했더니 포장한 상태 그대로 수납장에 넣어만 준 짐이 많았다. 옷이랑 이불, 책과 부엌살림 정도 당장 쓸 것들은 꺼내어 정리를 해주었지만 자잘한 짐, 창고에서 나왔다가 바로 창고로 들어가 버린 오래된 상자들은 다시 꺼내서 정리도 해야 되고, 쓸만한 것은 당근에 내놓고, 오래된 것은 버려야 했다. 이사 와서 싹 정리하고 가볍고 깨끗하게 살고 싶었는데 인아씨도 대명 씨도 정리를 잘 못했다. 며칠 쉬며 두 사람이 같이 정리하면 금방 할 것도 같은데, 회사 분위기가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대명 씨는 회사원이니까. 출근하는 건 당연하다. 대명 씨는 칼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잰걸음으로 지하철역을 향한다.
일찍 집을 나섰지만 괜히 출근시간 지옥철을 생각하니 마음이 바빠졌다. 앉아서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신분당선을 타고 판교까지 30분. 며칠 다녀보니 30분이 금방 지나갔고, 막힘 없이 가니까 생각보다 가까웠다.
추위를 뚫고 걸어가는 길이지만 발걸음이 가볍다. 일부러 미소도 크게 지어본다.
‘요즘도 환경 미화원 아저씨들이 있네.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쓱쓱 싹싹
빳빳한 초록색 플라스틱 빗자루로 도로 주변을 청소하는 미화원분들의 빗질 소리가 경쾌하다. 흐뭇해진 마음 때문인지 길가에 내다 놓은 쓰레기봉투들 마저 지저분한 쓰레기가 아닌, 간밤에 열심히 일한 주변 음식점들의 고된 흔적으로 느껴지는 출근길이었다.
왕복 8차선? 아니 그보다 더 넓어 보인다. 번쩍번쩍한 높은 빌딩들, 이 시간에도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네. 엇! 저기는 지난번에 왔을 땐 없었는데 새 건물이 올라오는 건가? 나도 여기에 건물 하나 있으면 좋겠다. 잘 왔다 잘 왔어. 매일 지나다니면서 내 건물 하나 찜 해 놓고, 언젠가는 아니, 빨리 서울에 건물 하나 사야지.’
이사오기로 결정하면서 상상의 나래 속에서만 바라왔던 서울 건물주의 꿈.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대명 씨는 리듬을 타며 서울 건물주의 꿈에 한 발짝 다가가는 기분을 느꼈다.
“어~김 과장. 굿모닝! 이사는 잘했어? 어디로 갔다고?”
옆팀 최부장님이었다.
“네 잘했습니다. 저 이사 간 거 소문이 벌써 났어요?”
“과장님, 맞다. 이사는 서울 어디로 가신 거예요?”
옆자리 이대리가 물었다.
“아, 저 반포 근처로.”
“반포요? 거기 강남? 엄청 비싼데 아닙니까?”
“아냐 아냐 그 근처 오래된 아파트가 꽤 있어. 아이들 교육 때문에 와이프가 가자고 해서.”
“오~ 집들이하세요! 한번 초대해 주세요! 궁금합니다. 서울 안 가본 지 너무 오래된 경기도민이거든요. 서울도 궁금하고, 강남 아파트도 궁금합니다!”
“에이~집들이할만한 집이 아냐! 오래된 아파트라 별로 안 좋아."
“아~구축. 새 아파트 살다가서 살기 불편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왠지 부럽네요 서울.”
“부럽긴! 판교가 훨씬 낫지. 새 아파트 단지에 회사 가깝지, 주변 깨끗하지. 학군도 좋지.
이 대리네 집 자가랬지? 그때 진짜 잘 샀어. 판교 집값도 엄청 올랐잖아. 그게 더 부럽다.”
“하하, 결혼할 때 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처가에서 하도 눈치를 줘서 대출 최대로 받아서 샀었죠. 아직도 이자가 엄청나요. 그래도…… 운이 좋았죠 뭐. 이렇게 부동산 가격이 뛸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때 안 샀으면 지금 저희 부부가 버는 걸로 내 집 마련은 정말 어림도 없었을 테니까.”
대명 씨는 판교에 똑똑한 한 채를 가지고 있는 이 대리네 집 이야기로 얼른 화제를 돌렸다. 회사에서는 대명 씨가 부동산 투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점심 먹고 커피 한잔할 때, 부동산 이야기가 나오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꾹 참고 모르는 척 남들 이야기에 끄덕끄덕만 할 뿐이었다. 열심히 일 잘하는 회사원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기도 했고, 부동산 이야기라고 해봤자 결국엔 누가 부동산 투자로 성공했다더라, 누가 어디 사서 망했다더라, 그때 거길 샀어야 했는데 라는 남들 이야기와 신세한탄에 가까운 수다뿐이어서 별달리 생산적인 대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동산 투자로 돈을 꽤나 벌었고, 무려 서울 건물주를 꿈꾸는 대명 씨였지만, 굳이 다른 사람들 대화에 끼어들어서 이래라저래라 충고하게 되는 게 싫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