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강남살이의 일상
탐스럽게 빨갛다.
크기도 적당한 것이 한 입 베어 물기 딱이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상큼함!
새콤달콤한 딸기향!
과일을 좋아하는 식구들을 생각하며 인아씨는
즐거운 마음으로 딸기 두 팩을 집어 들었다.
‘500g, 11,900원. 딸기값은 떨어지지가 않네.’
동물복지 유정란, 유기농 우유와 요구르트, 무항생제 소고기 국거리, 국내산 콩으로 만든 두부,
무농약 감자와 고구마, 당근 그리고 국내산 블루베리와 딸기가 카트에 가득 담겨있다. 마지막으로 맥주 몇 캔이랑 안주 삼아 먹을 나쵸칩 하나만 사면 끝이다. 인아씨는 집에 와서도 종종 밤늦게까지 일이 이어지거나, 메일로 급한 답장을 처리해 내는 남편을 생각했다. 거기에 N잡러답게 부동산 공부에 매물 검색에 새벽녘까지 잠을 줄여가며 일하는 대명씨는 가족 모두 잠들고 혼자 일하고 있을 때, 종종 탄산 가득! 차갑고 시~원한 맥주 한잔을 마시고 싶어 했다.
‘다행이다. 까먹지 않아서.’
회사 다니면서는 장 보러 갈 시간이 없어서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새벽에 배달해 주는 마켓컬리, 오아시스, 쿠팡 로켓프레시를 주로 이용했다. 상품도 다양하고, 4만 원 이상 사면 현관까지 무료배송이니 정말 편리했다. 물론 지금도 그 편의성 때문에, 그리고 거기서만 파는 몇몇 물건들 때문에 자주 이용하는 편이지만, 과일과 야채는 직접 보고 사고 싶어서 주 1~2회 정도는 집 근처 마트에 들르는 인아씨였다.
“할부는 어떻게 할까요?”
“일시불로 해주세요.”
띠리릭
“네 결제 완료되셨습니다.”
영수증을 받아 들고, 오늘 산 물건을 가득 실은 가방을 자동차 트렁크에 옮겨 실으며 인아씨는 생각했다.
‘먹고 싶은 것 마음껏 사 먹을 수 있어서 참 좋네.’
트렁크 문을 닫고, 인아씨는 마트와 연결되어 있는 스타벅스로 향했다. 매장 입구 쪽, 파라솔이 딸린 노천 테이블에 햇볕이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제 5월이니까 오늘은 왠지 자주 앉던 매장 구석 소파자리 말고, 바깥에 앉아 보고 싶어졌다. 사이렌 오더로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했다. 햇빛이 정면에서 비켜가도록 자리를 고쳐 앉고 잠시 주변을 바라보았다. 여유롭고 편안했다. 어제부터 보고 있던 재미있는 소설책도 한 권 가방에 가지고 왔으니 천천히 책도 보고 딴생각도 하며 한 30분 정도 앉아 있다가 갈 생각이었다.
‘역시 집에서 마시는 거랑 달라. 햇빛도 적당하고 날도 딱 좋아.’
출근 시간이 지난 오전시간이라 도로가 한산했다. 지나가는 차들도 보고, 사람들도 쳐다보고, 건너편 아파트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 살면서 잔고 걱정 없이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도 마시고, 한가로이 여유도 즐길 수 있어 참 다행이다. 부자가 된 기분이야.’
씩씩한 성격의 인아씨는 강남으로 이사하면서 티를 내진 않았지만 마음 한편에 조금은 겁이 나기도 했었다. 집세 내느라, 아이들 교육시키느라 경제적으로 빠듯한 삶을 살게 될까 봐. 퇴사한 이래로 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남편이 주는 생활비가 전부였다. 가끔 갑작스러운 경조사나 의료비로 예상치 못하게 나가는 돈도 꽤 됐다. 그런데도 부족하니 돈을 더 달라는 말을 하는 게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싫었다. 최대한 주어진 생활비만큼만 쓰려고 했다. 전업주부가 되고 보니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가계부도 안 쓰고, 그렇다고 적금을 드는 것도 아니니, 혹여 살림살이가 헤프다고 생각할까 봐 염려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사 오면서 사고 싶었던 다이슨 청소기와 공기청정기, 바이타믹스 블랜더, 그리고 대리석 식탁 같은 것은 하나도 사지 못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살림을 모두 그대로 쓰고 있는 상태였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 취향에 맞추기보다는 가성비로 구입한 작은 살림들을 바꾸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내 소유의 집으로 갔을 때 제대로 바꾸면 되니까.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막연히 그리던 화려한 생활은 아니지만 인아씨는 아이들 학교를 보내 놓고, 마트에서 장도 보고, 혼자 카페도 가며 그럭저럭 넉넉한 마음으로 강남살이에 적응하고 있었다.
“전에 지방에 사놨던 아파트가 팔릴 것 같아.
갭투자 1억이었는데, 대출 갚고, 세금이랑 부동산 중개 수수료, 유지관리 경비 등등 제해도 한 2천만 원 남을 거야.”
“오~우리 남편 대단하다! 지방 어디? 놔두면 더 오르는 것 아냐?”
“지금은 이 동네가 호재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는데, 팔릴 때 팔아야 하는 것도 있어. 특히 지방은. 부동산 경기가 좀만 안 좋아도 금세 떨어지거든. 그리고 이건 뷰도 좋고, 새 아파트라 이미 많이 올랐어. 더 많이 안 오를 것 같아서 임자 있을 때 정리하려고.”
“아~그래? 나는 당신한테 조금씩 주워듣기는 해도 잘 모르니까 당신이 잘 판단했겠지! 암튼 우리 남편 잘한다!”
“하하, 잘하긴. 나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도 많아. 내가 우리 가족 데리고 강남까지 왔는데 돈 더 많이 벌어서 서울에 건물 하나 사야지. 아이들이랑 다 같이 하고 싶은 거 하고 살 수 있게 해 줘야지.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고마웠다. 이번에 팔린다는 집의 잔금이 들어오면 수익 2천만 원이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인아씨도 잘 알고 있다. 대명씨는 분명 현금이 통장에 쌓이기 전에 새로운 투자처를 물색해 두었을 것이다. 그래도 부부의 자산이 늘어나는 것이니까 든든하고 기분이 좋았다.
“딱히 없어. 그냥 현금으로 많이 줘. 생활비나 넉넉하게 쓰게.”
“생활비가 모자라? 얼마 더 필요한데?”
“아니 이제 곧 어린이날 어버이날이니까. 가족들 선물이라도 하나씩 사야 되고 하니 빠듯할 것 같아서.”
“아 맞네! 그래 한 100만 원이면 양가에 다 될까? 이자 나가는 게 많으니 나도 여유가 엄청 많지는 않아서. 이번 것 잔금 받으면 통장에 돈 좀 보내 놓을게..”
“응. 고마워! 그 정도면 충분하지.”
‘드르륵’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은행어플에서 보낸 100만 원 입금 알림 메시지였다. 오늘 잔금을 받았나 보다.
고마워. 돈 들어왔어. 인아씨는 카톡으로 메시지를 남겼다.
응. 나 지금 회의.
ㅇㅋ 파이팅!
간결한 인사로 고마움을 표현한 인아씨.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은행은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큰 사거리에 있다. 사무실이 많은 동네라 큰 은행 지점들은 그 근처에 몰려 있었다. 빠빳한 새 지폐로 65만 원을 찾았다. 편의점에 들러 아이들이 어린이날 선물로 받고 싶다던 구글 플레이 상품권을 2장 사고, 양가에 드릴 현금 각 30만 원씩을 봉투에 담아 두었다. 만원은 예비로 지갑에 넣어두고, 생각했다.
‘내일은 여름티셔츠라도 한벌씩 사서 같이 선물로 드려야겠다.’
집으로 가려고 돌아서는데 길가에 사람들이 많았다. 안쪽 큰 사무실 건물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벌써 점심시간인가?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아우… 좁다 좁다.
골목골목 쓰레기에… 담배는 왜 이렇게 많이 피는 거야?’
‘서울 안 산 지 오래되어서 그런가…이런 데서 매일 근무하면 너무 스트레스받을 것 같아.’
결혼 이후 서울을 떠나 주로 회사 근처 신도시에 살던 인아씨는 업무 미팅으로 서울에 올 일이 있을 때마다, 불쾌함을 느끼곤 했었다. 자차로 올 때는 서울 들어서면서부터 거북이걸음이 되는 고속도로부터, 어쩌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오래된 지하철역에서 나는 매캐한 냄새나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지저분한 구석구석이 싫었었다. 인아씨는 새삼스레 그때 기억이 났다.
‘내가 서울에 안 살 때는 이 복잡함이, 지저분함이 그렇게 거슬리더니 이제는 또 아무렇지도 않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그런가? 아님 나도 이제 서울사람이라 정들었다 이건가?’
‘이 근처에 건물이나 하나 사면 딱 좋겠네! 저기 커피집들 좀 봐.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줄 서서 사 마시네. 식당들도 꽉 차 있고. 건물 있으면 식당, 커피집, 사무실로 임대료도 많이 나오겠는데. 이런 건물은 얼마일까? 매물 있나 네이버 부동산 검색이나 해볼까?’
자연스레 이어지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이런 생각도 다 하네. 인아씨는 기분 좋게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