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만에 다시 방문한 난임 병원
'나도 주인공이 돼보네 in a sad love story'
닳도록 듣던 음악을 다시 틀었다. 아이유가 피처링한 에픽하이의 '연애 소설'. 처음 이어폰으로 이 곡을 들으며 마을버스를 타고 병원에 다닐 땐 분명 최신곡이었는데, 그 사이 흘러간 명곡이 되었다. 시간이 지났고,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나는 아직 제자리다. 오랜만에 병원으로 향하며 들은 음악은 소름 돋도록 그때의 감정을 재현시켜 주었다. 버스 안에서 걱정과 기대,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던 그 기억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아침 8시도 되지 않았는데 병원 대기실 소파는 만석이었다. 전보다 젊은 사람의 수가 많았고, 남편과 함께 온 부부도 늘었다. 조심스레 음악을 끄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의사 한 명당 10명 이상의 대기 인원이 있는 전광판을 넋 놓고 바라보며 우리나라 여자들 이름이 참 거기서 거기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내 차례가 됐다.
"일 년 만에 오셨네요. 잘 왔어요."
오랜만에 만난 의사 선생님의 인사에 꼭 잡고 있던 가방 손잡이를 내려놓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진료실은 여전했다. 못 본 새 살이 오른 선생님의 통통해진 얼굴과 참석하는 세미나 명찰을 죄다 걸어 놓아 더 빡빡해진 옷걸이 말고는 변한 것이 없다. 차트를 체크하며 그 사이의 안부를 묻는 선생님에게, 집안에 일이 있어 늦었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너무 늦게 왔다고 다그치거나 서두르지 않을 선생님임을 알았다. 그 점이, 굳이 이 병원을 다시 찾은 이유이기도 하고.
"일 년이 지나간 것이 가장 큰 변수예요."
그럼에도 현실적인 문제는 피해 갈 수 없다. 남들은 한 달이 아까워 시험관 시술을 쉬지 않고 시도하는데, 느지막이 찾아온 게으른 환자는 현실 직시가 늦다. 그 사실을 알고 있듯 이번에는 조금 강한 어조다. 일 년 사이 부부의 몸 상태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장담할 수 없으니, 다시 검사를 해보자고 한다. 검사라면 이력이 났지만 별 수 있나. 상담이라는 이름의 진료를 마치고 문을 나서려는데 선생님의 한마디에 발길이 멈췄다.
"진짜 잘 왔어요. 이번에는 잘해봅시다."
다시 몸을 돌려 한번 더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저 말을 들으러 왔구나. 새벽부터 일어나 남들이 출근하기도 전에 병원을 찾는 사람들도 저 한마디가 절실했겠구나. 하지만 진료실 밖에서 여전히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해 얼른 미소를 거뒀다. 속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임신에 성공해 병원을 졸업하는 사람으로 비출 수 있고, 괜한 불편감을 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웃음도 울음도 조심스러운 공간을 빠져나와 기계처럼 수납을 하고 피를 뽑았다.
이제 남은 건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시술을 진행하는 일이다. 망설이던 때와 달리 행동하는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분명 생각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겠지만, 내일 걱정은 내일모레. 이번에는 잘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