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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돌 Mar 27. 2020

고모, 여동생은 언제 나와요?

난임 고모가 빨리 여동생 낳아주길 기다리는 6살 조카를 보며

조카가 두 명  있다. 오빠네 아들 둘. 어쩌다 보니 두 조카가 태어나는 순간을 함께 했고, 자라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며 지냈다.  '고모'라는 타이틀 때문에 눈치 없는 시누이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새언니와 나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 좋다고 말하면 '그건 네 생각'이라고 저항을 받을 것 같아 나쁘지 않다 정도로 마무리한다.


결혼 전, 야밤에 위경련으로 쓰러진 언니를 응급실로 보낸 뒤, 혼자 첫째를 데리고 밤을 보낸 날이 있었다. 두 살도 안 된 아이를 겨우 재우고, 심란한 마음으로 이유식을 만들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다. 예민하고 자주 아픈 아이를 돌보느라 심신이 지친 새언니 대신 내가 이 아이를 맡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곧 결혼도 해야 하는데,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일은 한때의 해프닝으로 지나갔고, 오빠는 네가 왜 오버냐고 웃었으며, 새언니는 건강하게 둘째까지 낳고 잘살고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의 걱정은 진심이었다. 어린 생명을 책임지는 일의 무게를 처음으로 체감한 날이었다.




나의 이런 상상력 돋는 걱정과는 별개로, 첫째 조카는 엄마와 아빠, 양가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씩씩하고 쾌활하지만 여전히 예민한 아이로 잘 자랐다. 어느덧 초등학생이 되어 세 살 어린 남동생도 제법 잘 데리고 다닌다. 동생과 피 터지게 싸우는 날의 연속이긴 하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니 크게 걱정은 없다. 밖에서는 활발하고 집에서는 점잖은 보통의 초등학생이 되었다. 유모차를 타고, 문화센터에 가고, 놀이터에서 술래잡기하던 아기 시절이 지나니 딱히 고모를 찾지도 않는다.


상대적으로 어리고 해맑은 둘째는 아직 고모를 잘 따르는 편이다. 형에게 치여 온전히 놀아줄 사람이 없는 관계로 본인의 말을 다 들어주는 고모를 무척 좋아한다. 사실 그 녀석이 나를 따르는 게 아니라 내가 둘째를 따른다고 보는 게 맞겠다. 고모의 격한 리액션과 큰 키를 이용한 지게차 역할에 열광하는 조카. 리듬을 타며 놀아주는 모습을 보고 누가 누구랑 놀아주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첫째 때는 매사가 조심스럽고 겁났는데, 둘째는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이 되어서인지 편하게 대한다. 하지만 아낌없이 놀아주는 건 딱 7살까지. 이제 둘째도 슬슬 친구들 따라갈 때가 됐다.

 



여러모로 사랑스러운 두 조카지만, 가끔은 어린이답게 당혹스러운 질문을 하기도 한다. 작년 봄, 첫 임신을 하고 가족들에게 알린 후였다. 들뜬 마음에 모두에게 알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산했고, 몸을 추스르느라 한 달 정도 만에 오빠 집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만난 둘째는 여느 때와 같이 새로 생긴 장난감을 실컷 자랑하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내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고모, 여동생은 언제 나와요?"


천진한 얼굴로 묻는 아이를 보며 아차 싶었다. 아,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나. 예전에 '여동생이 좋아, 남동생이 좋아?' 하고 물어보니 '음.. 여동생이요.' 했던 둘째는 고모가 임신을 했으니 드디어 여동생이 생긴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거침없이 여동생이 언제 나오냐 묻는 말에 나보다 더 당황한 건 새언니였다.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얼굴로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둘째는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눈치를 봤다. 아이가 눈치 보는 상황에 내가 또 미안해져 급하게 말했다.


"응, 아직은 아니고 조금 있다가 온대~"


대충 얼버무리고 나니 마음이 조금 아팠다. 나나 새언니나 부모님과 친척이 모두 멀리 계셔서 서로 의지하는 부분이 많았고, 오빠와 결혼하기 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세월이 길다. 터울이 적게 아이를 낳으면 근처에 살면서 서로 봐주자고 얘기한 적도 많았다. 덕분에 나는 사랑스러운 조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지낼 수 있었다. 둘째가 태어나고 쓰던 물품을 새언니는 나 때문에 보관해 두기도 했었다. 곧 아이가 생길 수도 있으니. 물론 그 물품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말이다.




가끔은, 두 조카가 없었다면 내가 아이를 갖고 싶어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방비 상태로 태어난 갓난아이가 얼마나 어른들의 기운을 쪽쪽 빨아가는지 봤다. 몸이 상할 정도로 에너지를 쏟아야 아이가 올바로 자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는 행복과 기쁨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알아버렸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어린이에서 청소년이 되어가면 육체보다 정신적 힘듦이 더 커진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아이를 키울 때 생기는 경제적인 문제도 그때부터 시작이라고들 한다. 그런 부분까지 생각이 뻗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그때의 내가 하나씩 풀어나갈 문제가 아닐까 싶다.


여동생이 언제 나오는지 물어보는 천진한 둘째 조카를 나는 사랑한다. 그 옆에서 동생을 놀리다가 갑자기 과학책을 뽑아 드는 오빠 판박이 첫째 조카도 무척 사랑한다. 이제 몸으로 놀아주는 고모 역할은 끝나가지만, 언제까지나 기댈 수 있는 고모로, 어른으로 지내고 싶다. 부모님을 제외하고 자기편을 들어주는 어른 한 명쯤은 있어야 든든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조카들에게 그런 역할을 해주고 싶다. 그리고 조카들 옆에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은 쪼그만 동생 하나 놔주어야지. 여동생일지 남동생일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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