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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돌 Apr 21. 2020

태교 여행지는 고민할 필요 없겠네

아이는 없지만 미리 다 가봤으니까

방구석 여행이 대세다. 사진으로나마 답답한 이 상황을 달래 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예전 같으면 지금쯤 슬슬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어야 할 시기인데, 올해는 어쩔 수 없이 옛날 사진을 들춰보며 추억여행을 떠난다. 이 역시 코로나 19가 바꿔놓은 일상이다.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폴더 하나에 몰아넣었던 사진들이, 올해는 꽤나 유용하다. 하나씩 넘겨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내가 여기도 갔었구나~ 하며 감탄하는 사진도 있었다.

 



책 읽기, 영화 보기가 취미인 우리 부부는 큰돈 드는 취미가 없다는 핑계로 거의 매년 해외여행을 다니고 있다. 여행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는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낯선 나라에 있다가 홈 스위트홈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즐긴다. 하나의 이벤트로 즐기는 여행이다 보니 행선지도 주로 편하게 쉬다 올 수 있는 휴양지다. 둘 다 물을 좋아해서 배를 타고 나가 스노클링을 즐기거나 수영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겨울에 가도 봄에 가도 항상 시커메져서 돌아오는 것이 우리 여행의 공통점이다.


휴양지로 여행을 가는 또 다른 이유는 매해 임신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방사선과 뎅기열, 지카 바이러스 같은 이슈가 있는 나라들을 피하다 보니 맘 놓고 갈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자꾸 태교 여행이나 가족 여행 가는 사람들과 함께 비행기를 탄다. 신혼여행지였던 하와이를 비롯해 괌과 사이판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마치 대가족이 이동하는 듯한 여행길이었다. 다행히 비행시간 내내 우는 아기는 없었지만, 순번을 정한 듯 돌아가며 칭얼대는 아기들과 함께여서 가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았다.




2013년 하와이 / 2014년 세부

첫 신혼여행지였던 하와이. 벌써 7년 전이라 세세한 기억은 안 나지만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이렇게 맘 놓고 긴 시간 여행할 수 있는 날이 흔치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기억만은 확실하다. 이 생각 하나로, 결혼식 준비보다 신혼여행 준비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초보운전자였던 남편은 기어이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아 렌트를 했고 하와이의 해안도로를 달렸다. 처음으로 타 본 머스탱에 흥분한 남편은 괜스레 차에 기대어 포즈를 잡기도 했다. 섬 곳곳이 그림이라 가는 곳마다 탄성이 났고, 와이키키 해변과 호텔 근처를 걸으면서 사진도 많이 찍었다. 하와이에서 머문 일주일 가량 말 그대로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서로에 대한 기대가 달라 많이 싸운다고 하는 신혼여행지에서의 다툼도 일절 없었다.


바로 다음 해에 가게 된 세부에서도 여전히 신혼 같은 느낌으로 즐기고 돌아왔다. 물론 하와이만큼은 아니었지만, 짧은 일정을 최대한 알차게 보냈다. 둘 다 겁이 많아 밤거리를 돌아다니지는 못했지만, 툭툭을 타고 이동하면서 살짝씩 동네를 구경했다. 조식과 수영장이 좋은 호텔을 잡아서 한국에서는 절대 못 할 호캉스도 즐겼다. 여행사 패키지를 통해 섬으로 호핑투어도 가고 소소한 낚시도 즐기고. 하와이에서의 좋은 추억과 세부에서의 시간 덕에 '우리는 휴양지 여행이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아이가 생기면 이렇게 둘이 다니기 힘들 거야'라는 생각이 컸다.

2016년 괌 / 2017년 사이판

결혼 3년 차부터는 임신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나라인 일본 대신 홍콩을 선택했고, 그다음 해에는 괌을, 그다음엔 사이판을 다녀왔다. 하와이스러운 느낌의 괌은 바다도 예쁘고 시설도 괜찮았다. 쇼핑하러 다니기도 편하고 아담한 분위기라서 좋았다. 반면 시골 느낌이 나는 사이판은 시설은 별로였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 마음에 들었다. 훨씬 청명한 느낌이랄까. 그때의 날씨 탓도 있겠지만 왠지 더 정겨운 곳으로 기억된다. 햇살이 너무 세서 잠시만 걸어도 피부가 탔지만, 굉장히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특히 마나가하섬은 가본 중 베스트 섬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때는 그 전의 여행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리조트에서 비슷한 일정을 보내면서 푹 쉬고 물놀이를 한 건 좋았지만 비행기에서부터 함께 한 아이들이 어딜 가든 나타나는 것이 신경 쓰였다. 조식을 먹을 때도, 섬에 나갈 때도, 리조트 수영장에서도 계속 마주치는 가족들. 여행 가면 아이가 생긴다는 주변의 조언과 임신에 혹시나 나쁜 영향을 줄지 모르는 요소들을 따져가며 떠났던 여행은 신났지만, 어딘가 서글펐다. 숙제 같은 여행이어서 그랬는지 그 전보다 사진을 많이 찍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남편과의 다툼도 몇 번 있었다. 훌훌 버리고 떠나야 하는 여행에 부담감을 짐처럼 싸들고 가서 그랬던 건가 싶다.

2019년 코타키나발루

가장 최근에 다녀온 곳은 코타키나발루. 말레이시아에 다녀오면 3개월에서 6개월가량은 시험관 시술을 못 하게 하는 병원도 있다. 하지만 잠시 시술은 미뤄두기로 했던 때라 아몰랑 하면서 다녀왔다. 세계 최고의 선셋을 볼 수 있다고 해서 기대가 컸고 실제로도 멋진 장면을 많이 봤다. 비록 선셋을 볼 수 있는 4일 중 3일은 비가 와서 아쉬웠지만, 리조트도 예쁘고 근처 해변도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쳤다. 그리고 생각보다 시내를 돌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야시장에서 바가지를 쓰고 사 먹은 망고도 맛있었고, 너무 일찍 가서 사람이 없었던 섬에서의 시간도 좋았다. 쇼핑센터를 다 뒤져서 산 마그넷과 기념품도 마음에 쏙 들었다.


괌이나 사이판과는 다르게 나름대로는 큰 용기를 내서 간 여행이었지만, 혹시나 몰라 선크림보다 모기퇴치 약을 더 많이 챙겼다.  마음속은 편하지 않았던지 여행 내내 모기퇴치 약을 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번이 진짜 둘이 오는 마지막 여행일 거라는 생각이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기도 했다. 여행 가서 아이가 생기는 부부들은 진짜, 진심, 레알 마음을 비우고 가는 모양이다. 나는 참 그게 힘든 모양이고.




여행 전 계획을 세우고 비행기를 타고 새로운 나라의 문화와 색깔을 보는 재미는 분명히 크다. 물놀이를 즐기며 망중한에 빠져 하루를 보내는 일 역시 큰 즐거움이다. 하지만 신혼여행 이후의 여행에서 그때만큼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건 마음의 부담 때문이었다. 사실 진짜 놀라운 건, 행선지를 결정하는데 임신에 대한 걱정이 생각보다 큰 부분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에서야 제대로 알게 됐다는 것이다. 사진을 다시 찾아보며 알았다. 내 생각보다 나는 꽤 오래 그리고 깊은 마음으로 아이를 기다려왔구나. 당장의 기쁨보다 아직 오지 않은 아이에 대한 걱정이 컸구나. 돌이켜보니, 그랬다.  


마음의 짐을 안고 떠난 지난 여행이 후회스러운 건 절대 아니다. 순간의 즐거움은 삶의 원동력이 되었고, 이렇게 사진으로 남아 그때의 행복감을 다시 느끼게 해 준다. 지금처럼 운신이 제한될 때는 추억여행을 시켜주는 고마운 기억의 조각들이 되어주어 고맙기도 하다. 거기에 예상치 못한 좋은 점 하나. 생각해 보니, 앞으로 태교 여행을 어디로 갈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미 다녀와 봤으니까.


여행의 기억을 복기해 본 결과 처음에는 사이판, 그다음에는 괌이 좋겠다. 풍광은 사이판이 더 보기 좋았지만 편리함을 따지면 괌 리조트가 더 좋았다. 말레이시아는 너무 멀고 세부는 위험요소가 좀 있으니, 사이판은 태교 여행지로 괌은 아이와 함께 갈 첫 여행지로 딱이다. 어차피 올해는 마음 비우기 힘들 것 같으니 이런 생각이라도 하면서 지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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