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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돌 May 08. 2020

엄마에게 전하지 못하는 말

나도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어

"너도 나처럼 힘들게 아이를 낳겠구나 싶었어."


임신중독증으로 힘들게 오빠를 낳고 둘째를 유산한 엄마는, 예상치 못하게 나를 가졌다. 고개를 처박고 세상에 나오기 싫어하던 나는 예정일보다 한참 뒤, 긴 진통 끝에 나왔다. 까맣고 털이 많은 여자아이를 보며 아빠는 '엄마 닮았네'라고 했고, 엄마는 '아니, 당신 닮았어요'라고 말했다는 후문이 있다. 딸로 태어난 나를 보며 어떤 느낌이었냐고 물으니 엄마는 여자로 살아갈 내가 안쓰러웠다고 대답했다. 이 아이도 자라서 나처럼 힘들게 아이를 낳겠구나 싶어 기쁘면서도 슬픈 감정이 한 번에 들었다고. 




국어 교사였던 엄마는 어딜 가나 똑 부러지는 서울 말투를 구사했다. 경상도 지역으로 내려간 지 30년이 가까운데도 전혀 사투리가 배어있지 않다. 동네에서도 서울아지매로 통하는 엄마는 오빠와 나를 낳고 전업주부로 지냈지만, 아빠가 사업을 시작한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아빠의 사업을 도우며 내조했다. 항상 바쁘고 무뚝뚝한 아빠를 대신해 나와 오빠의 엄마이자 아빠 역할까지 했던 엄마는 우리에게 그리 살갑지는 않았다. 항상 믿음을 주고 애정을 전했지만 스킨십이 잦지는 않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어린이였던 시절엔 엄마가 나를 엄청 예뻐했던 기억이 있다. 사진 속에 남아있기도 하고 기억 속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목욕탕에서 엄마가 머리를 감겨주면서 '오늘은 볶음밥을 만들어볼까~'하며 샴푸를 뿌려 요리하듯 거품을 내는 모습을 보고 옆자리 아주머니는 '어머, 엄마야 이모야~~?' 하며 놀랄 정도였다. 10살 이후에는 이런 식의 스킨십이 없어졌지만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면 가슴속부터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온전히 사랑받던 그 시절의 추억이 나를 감정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해주었구나 싶다. 


어려운 일은 혼자 감내하는 장녀 스타일의 엄마는 친정 일까지 도맡아 하다 보니 심리적으로 지쳐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 자식들에게 그런 모습을 내보이기 싫어하는 엄마를 알기에 우리는 투정을 부리지 않았고, 가족은 독립적으로 자기 할 일을 하면 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원하는 게 많은 오빠는 종종 엄마 아빠와 부딪히기도 했지만, 나는 항상 조용히 지냈다. 표현에 소극적인 무심하고 철없는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큰 간섭도 요구도 없이 막내의 특권을 누리며 자랐다.




스무 살 독립 이후, 아무도 모르는 사이 엄마는 지독한 갱년기를 겪었고, 강한 멘털의 소유자였던 엄마가 흔들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자식들이 모두 떠난 집에서, 밀려오는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던 엄마에게 아빠의 어설픈 위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잘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다 참고 견뎌온 것이었고 급기야는 구겨져 있던 마음속의 응어리가 풍선처럼 펑 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그때 내가 엄마의 버팀목이 되어야 했는데, 이십 대의 나는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오빠와 아빠에게 모든 짐을 미뤘다. 아직도 두고두고  후회되는 시절이다.


삼십이 넘어 결혼을 하고 겨우 어른이 되었을 때, 엄마는 첫사랑 같은 손자를 얻고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조카 덕분에 집안에 생기가 돌았다. 거리상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엄마의 애틋한 손자사랑은 가끔 질투를 불러일으킬 정도다. 건강 문제로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가족의 소중함을 크게 깨달으며 삼십 대를 지내는 과정에서 나는 그전에 못다 한 표현을 최대한 하려고 노력했다. 엄마도 예전보다는 당신의 이야기를, 가슴속 감정을 풀어내려 했고, 나는 이제야 딸로서 엄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뒤늦은 딸의 반성으로 엄마와 나의 관계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엄마가 너무 좋아 어릴 적 꿈이 엄마였던 나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기분이다. 하나씩 곱씹어보면, 엄마는 한 번도 나에게 사랑을 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진짜 엄마가 됐을 때 과연 그만큼의 희생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다른 집 모녀처럼 알콩달콩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사랑을 전한다. 학창 시절 내내 받았던 엄마의 도시락 쪽지가 이제야 내 손끝에서 글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런 엄마에게 내가 전하지 못하는 말이 딱 하나 있다. 엄마. 나도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어. 난임 병원에 다니고, 보건소에서 지원을 받고, 에세이도 쓰고 있다는 말을 엄마에게만큼은 전할 수가 없다. 내 지인도, 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데 엄마에게는 솔직히 말할 수가 없다. 남편이랑 별 문제없고, 시댁에서도 크게 바라지는 않으셔서 스트레스는 없어요. 생기면 낳아야지. 정도의 말만 전할 뿐이다. 물론 엄마가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굳이 말해본 적은 없다.


갓 태어난 딸을 보고 여자의 삶이 고단할 거라 걱정하는 엄마에게, 나 아이가 갖고 싶은데 생기지 않는다 말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내 마음을 말하는 순간, 언어로 표현되는 그 순간부터, 엄마가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자책을 할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엄마처럼 혼자 문제를 끌어안고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다. 힘들면 말하고, 엄살도 부리고, 기분도 얼굴에 다 드러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은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 역시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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