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선생니임~ 공주왔어요옹~" 하는 게 우리 A의 평범한 하루 시작이라서, A가 공주왔어요옹~을 할 때면 난 "그래 공주님 어서 오시지요. 별일은 없으신지요?" 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A는 또 동글동글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없어요옹~ 오늘 뭐 배워요옹?"
어느 날 A와 Y가 속한 반 수업을 하다가,
'요즘 누구랑 누구랑 사귄대요,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당사자한테 물어보고 이야기하는 걸까? 나쁜 소식은 아니지만, 당사자는 비밀로 하고 싶을 수도 있으니, 그런 얘기를 할 때는 꼭 조심하거나, 당사자한테 물어보자.'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A가 손을 들었다.
"선생니임~ 자기가 말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옹?"
응? 하고 반문하고 말았다. 응? 뭐지? A가 지금 말할 게 있다는 건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싶다는 건가? 해석하기 어려운 말이라, A의 눈을 다시 쳐다보았다. 동그란 안경 속의 눈빛이 아주 신나고 즐거워 보였다. 뭐랄까, 100점 받은 시험지를 숨기고 저 몇 점 받았게요? 하는 표정이랄까?
아, 너 지금 누군가랑 사귄다고 자랑하고 싶구나?
A의 솔직함이 약간 당황스러우면서도, 얼마나 신이 나면 저런 표정을 할까 싶어 웃음이 났다.
"아니 뭐! 자기가 자기 일을 너무 말하고 싶으면 말하는 거지요.
너무 좋아서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되지요." 하고 말해놓곤, 다시 A를 쳐다보았더니 네 엥~ 하곤 고개를 푹 숙인다. 얼굴이 좀 붉어진 듯도 싶었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 돌아가기 전 A는 내게 와 말했다. "선생니임 저 사겨요옹"
푸하하, 웃음이 나는 순간이었다. 아까부터 너무 나에게 알려주고 싶던걸,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터뜨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을 빛내며, 선생님 대단하죠 신기하죠 부럽죠 뭐 이런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자랑을 들었으니 걸맞은 리액션을 해주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애? 우와아~ 축하해! 어때? 재밌어? 마음이 편해?"
"네엥~ 너무 좋아요옹~"
A랑 사귀는 게 같은 반 Y라는 걸 알게 된 건 그날 오후 A의 담임선생님을 통해서였다.
그때까지 내 마음속의 Y는 딱딱한 바닥 위를 걷는 녀석이었다. 똑똑하고, 자기 할 일도 잘하고, 공부도 곧잘 하는. 그런데 좀 딱딱하고 무뚝뚝한? 이런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상남자 스타일이랄까.
그런 Y가 A의 너무 좋은 남자 친구라니, 뭔가 어색했다. 반대라서 끌리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곤 금세 잊어버렸다. 아이들은 하루를 사귀기도 하고 일주일을 사귀기도 하고, 뭐 그러니까.
내가 이 귀여운 커플을 관찰하게 된 건 며칠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내 교실 앞쪽에는 5학년 담임 선생님들이, 학생들이 쉬어 가라고 놓아두신 1인용 소파가 3개 있는데, 학생들이 이 소파를 굉장히 좋아했다. 쉬는 시간 종이 탕! 하고 치면 뛰쳐나와 소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이들이 자주 하는 놀이였는데, 자리를 차지한 학생은 여유롭게 앉아 유유자적( 그래 봤자 10분이다) 쉬는 시간을 보내고, 아쉽게 놓친 학생은 다음 쉬는 시간의 의지를 다지며 소파 주위를 맴도는 것이다. (정말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공간의 여유만 있다면 소파를 더 갖다 놓고 싶을 정도다.)
그날도 역시 소파 차지하기 놀이가 시작된 참이었다. Y가 가장 먼저 뛰어나와 의자 한 칸을 차지했고, 나머지 두 자리도 금방 채워졌다. 후발주자들이 뒤늦게 나왔다가 매진된 자리를 보고 돌아가기를 몇 번, 실망하는 아이들이 얼굴이 귀여워서 푸스스 웃던 순간이었다.
A가 나타나선 소파 주변을 한번 휙, 돌아보았다. 남자 친구 옆에 앉고 싶은데 자리가 없어서 그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지켜보았더니, A가 Y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게 아니겠는가. 정말 빠-안-히. 그리곤 씨익, 하곤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Y의 손을 잡고 (약한 힘으로) 슬슬 끌어내는 게 아닌가.
여기까지만 보았어도 충분히 놀라울 텐데, 그 뒤의 Y의 행동은 나를 완전히 K.O. 시켰다.
손을 잡힌 Y는 A의 약한 힘에 슬슬 끌려 일어나는 척해주더니,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만족스럽게 앉는 A를 내려다보고는 그보다 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리고 A가 너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고는 교실로 돌아갔다.
아니, 저 표정은 뭐란 말인가?
뭔가 보아서는 안될 것을 봐버린 기분이 들어 그 자리를 얼른 피하고 말았다.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 귀엽고 풋풋하다 싶으면서도 징그러웠다.
아니 지가 몇 살이라고 저렇게 어른 얼굴을 하고 다른 앨 귀여워한단 말이야? 당황스러웠다.
당최 저 표정은 뭐지?
내 어린 제자들이 언제부터 저런 표정을 지었지?
내가 이 표정과 행동을 어디서 봤더라?
그날 퇴근하고 나서도 계속 둘의 모습이 떠올랐다.
둘이 특별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표정들이 나를 한참이나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내가 A와 Y가 자라는 순간을 지켜보았구나.
둘이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순간에, 그리고 한 뼘 어른에 다가서는 지점에 내가 서있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마음이 불편했구나,
아직 다 크려면 한참 먼 것 같은 아이들이
다 큰 어른처럼 성숙하게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받는 게,
서로를 예뻐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게 너무 어색하고 당황스러웠구나.
며칠 뒤 과학 선생님과 점심을 함께 먹는데 A와 K이야기를 하시는 거였다.
"실험을 시켜두고, 다른 모둠을 돌아보는 찰나에 보니 걔네 둘이 아주 귀엽더라. A가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막 매만지니까, Y가 얼른 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오는 거 있지? 어머, 내가 봐도 너무 다정하고 스위트 하더라 얘."
이번엔 순수하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귀여운 것들.
그 어떤 영화보다도 싱그럽고, 풋풋했다. 지켜보고 있자니 나까지 기분이 좋고,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저 앞으로도 지금처럼 서로가 서로한테 좋은 친구였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 어린 손님들을 훨씬 빠른 속도로 자라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사랑의 계절은 지나가고, 매년 오는 이 유행병도 사그라들지만, 아이들 모두가 이전보다는 조금 깊은 눈을 하고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