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라며 아이유가 잔소리를 부를 때 분명 그 노래는 달콤했다.
연인들 사이의 귀여운 걱정, 투정, 애정. 열정.
그런데 사실 잔소리가 늘 그렇게 달콤하지는 않다.
아이라고 잔소리를 듣기만 하는 게 아니다. 나의 귀여운 손님들도, 종종 잔소리를 한다.
1.
같은 반인 J와 C는 얼핏 보면 닮은 구석이 꽤 있다.
옆으로 죽 찢어진 눈이라던지 말랐지만 큰 키 같은 것.
말이 많고 유들유들한 면이나, 어느 정도 무신경해 보이는 사춘기 소년들 특유의 분위기까지도.
그래서 나는 내가 목격한 이 장면이 너무나도 재밌었다.
조사활동을 하기 위해 짝을 지어주다가, 앞뒤로 앉은 J와 C를 한 팀으로 묶어주었다.
의외로 C는 아무런 대꾸가 없는 반면, J는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원하는 짝을 고르게 하지 않고 내가 묶어주면 늘 있는 일이라, J의 '아-'도 습관적 감탄사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얼마지 않아 나는 J와 C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대화라기엔 좀 일방적이긴 했다.
"야야. 이거 이름부터 써야지, 이름 안 쓰고 뭐해"
"쓰면 되지이-"
"아아아- 쫌! 빨리 사진 보고 모양 찾아 적으라고! 뭐하냐아"
"한다! 한다!"
"아유 참, 야! 이건 느낀 점 적는 칸이잖아. 그거는 옆에 적어야지 쫌!"
"아- 알아서할게에"
J의 말에 옴짝달싹 못하고 의자에 앉아 느릿느릿 연필을 움직이는 C의 모습이 제법 웃겼다. 그도 그럴것이 교실 전체에 충분히 들릴만큼 J의 목소리는 큰 반면, C의 목소리는 어딘가 힘없고 속삭이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나 말고도 주변 친구들 몇몇이 J와 C를 보고 키득거리는 게 느껴졌다.
사실 C는 활동 시간에 자기 것보다는 다른 친구의 것에 기웃거리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오늘은 전혀 그러질 못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약간은 불편한 표정을 하곤 학습지에 집중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봐봐라 내가 옆에서 하나씩! 하나씩 다 짚어줘야 하고
나 딴데보면 니꺼안하고 M이랑 이야기 하잖아. 으유우"
"아 쪼옴- 한 번만 말해라 귀 아프다"
"한 번만 말하면 네가 안 하니깐 그렇지! 으유우, 내가 일일이 챙겨야 되고 귀찮아 죽겠어 정말!"
"알겠다고오-"
잔뜩 상기된 톤의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리는데도 어쩐지 웃음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C를 잔뜩 압박하려는 J의 목소리가 하나도 위협적이지가 않았다. C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전혀 타격 없는 얼굴로 학습지를 빼곡하게 채워나가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J의 도움을 받아 그림까지 그려 넣고는, 순진한 눈으로 J를 쳐다보았다. 야 다했음.
꼼꼼한 눈으로 C의 학습지를 살핀 후
J가 다시 인상을 팍 구기며 이렇게 응수했다.
"으이굿, 내가 안 챙기면 안하제! 언제 철들래 진짜!"
아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나 이거 알아, 아마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엄마의 잔소리였다. 못살아 으유우- 하는 얼굴과 목소리, 귀찮아 죽겠어 정말- 하면서 하나도 안 귀찮아하는 행동, 언제 철들래 진짜! 하는 속이 빈 위협까지! 완벽했다.
J는 엄마의 마음으로 친구인 C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아마도 C는 J의 그런 마음을 어렴풋이 느꼈기에 고분고분 굴었으리라.
키가 나보다도 큰 사춘기 소년들이 하는 대화치고는 너무나 다정하고 무해해서
이 장면을 꼭 기억해둬야지,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J가 다른 일을 하는 사이 몰래, C에게 물었다. 너 J말 잘 듣는다?
C는 퍽 짓궂은 얼굴을 하고 어울리지 않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야 해요, 그래야 잔소리 빨리 끝나요.
역시 엄마 말은 잘 들어야 한다.
2.
몇 해 전 어느 날, 운동장 활동을 하러 나서는 길이었다.
그날따라 햇빛이 대단히 따가웠고 학생들에겐 미리 안내한 터라 다들 모자에 선크림에 단단히 준비를 해 온 것 같았다.
어쩐지 내 모자를 챙기는 것을 깜빡해서, 햇빛에 속수무책 당하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어쩔 수 없지- 하는데 Y가 물었다. 선생님 모자 안 챙겨 왔어요?
"응 깜빡했네"
"선생님! 자기 전에 준비물을 미리미리 챙겨두셨어야죠"
Y의 표정이 단호했다.
뭔가 입장이 바뀐듯해 당황스럽기도 한데, 미리미리 챙겨두란 말이 제법 똑똑해 기특하기도 했다.
내가 평소에 이런 얼굴을 하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할까? 하는 생각이 스침과 동시에
이 어린 친구가 나를 챙겨주려는구나 싶어 유쾌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개를 세게 끄덕여주며 대답해주었다.
응, 다음엔 꼭 미리미리 챙겨둘게요.
그런데 그 세찬 고개 끄덕임에서 Y는 무언갈 느꼈는지 그날 이후로 종종 나에게 비슷한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커피는 하루에 한잔만 먹는 거래요, 선생님 컴퓨터를 할 때는 허리를 펴야죠, 선생님 에어컨을 너무 많이 켜면 안 된대요. 하면서.
처음엔 그래, 꼭 그럴게요. 하며 정성 들여 대답하곤 새끼손가락까지 걸어주었는데 점점 그 횟수가 많아지자 약간은 피곤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Y가 살피고 있다는 느낌을 받자 너무나도 피곤했다. 나중엔 내가 선생님이야- 하는 반발심마저 들었다. 우리 반에 아홉 살짜리 엄마가 한 명 더 있어-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하하하 너 말 잘 들어야겠다- 하고 웃기만 했다.
결국 어느 날 Y에게 조심스레 말해보았다. Y, 선생님 잔소리 너무 많이 들어서 조금 스트레스받는 것 같아.
잠시 생각하던 Y가 그럼 쫌만 참을게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휴, 내가 어쩌다 Y의 딸처럼 되어버렸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리라 싶어 꾹 참았다. 고마워 Y.
그날의 약속 이후로 한동안 Y는 나에게 어떤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가끔 뭔가 되게 말하고 싶은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는데, 그럼 왠지 나는 불편한 기분으로 내 주변을 살펴보곤 했다.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 반찬을 남기지 말아야죠! 편식하면 키 안 커요!"
급식소에서 내 자리 앞을 지나가던 Y가 고함치듯 나에게 일러주었다.
나는 콩을 싫어해서, 콩자반 반찬의 대부분을 손도 대지 않은 채 남겨두었는데, 그걸 본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알겠어- 하고 지나칠 텐데, 허리에 손을 올리고 야무지게도 말하는 Y에게 그날따라 약간 반항(?)하고 싶었다.
"왜? 선생님 콩 먹기 싫은데-"
"선생님 원래 맛없는 게 몸에 좋은 거예요. 빨리 콩 다 드세요!"
단호한 목소리로 콩을 먹을 것을 지시한 Y는 나를 혼내는 듯한 엄한 표정을 짐짓, 지어 보였다.
굳게 다문 입술이 꽤나 의지 있어 보여 콩 한 숟가락을 펐다. 그랬더니 Y가 말했다.
"다 먹고 있으세요. 좀 있다 와서 볼 거예요!"
꼭 방청소를 하지 않아서 엄마에게 혼나던 기분을 그대로 느끼며, 결국 나는 모든 딸들의 치트키를 쓰고야 말았다. Y, 내가 알아서 하면 안 될까? 내가 알아서 할게
3.
잔소리가 늘 그렇게 달콤하지는 않다.
그래도 잔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그렇게 크게 타격받지 않는 건, 그 잔소리 밑에 나를 향한 상대의 관심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다 우리는 다 안다. 관심 없는 사람에겐 잔소리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 귀여운 손님들도 아마 자신들이 받은 애정 어린 잔소리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