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15분 팜플로나 시내를 빠져나왔다. 이전에 왔을 때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갔던 일이 떠올라 정신 바짝 차리고 이정표를 따라 걸었다. 1시간 30분쯤 걸어 시내를 지나고 시주르 메노르에 도착했다. 이 마을을 지나면 대부분 들과 산이어서 점심을 넘길 때까지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간단한 요기를 하기 위해 카페에 들렀다. 80세는 족히 넘겼을 인상 좋은 어르신이 바리스타, 서빙, 청소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몸짓 눈짓으로 우유를 섞은 따듯한 커피 한 잔과 바케트 빵을 주문하니 빵 바구니를 비우자마자 또 한 바구니 가져다주었다. 맞는 방법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바케트 빵에 블루베리 잼과 버터를 동시에 발라먹으니 맛이 일품이다.
든든한 몸과 맘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간간히 흩뿌리던 비가 그쳤다가 내렸다가 제멋대로 날씨였으나 론세스발레스 사무실에서 구입한 판초우의가 있으니 걱정이 없다.
멀리 페르돈 고개가 보인다. 저 언덕에 도달하면 14.4km, 오늘 길의 절반을 넘는다. 언덕을 넘어 9km를 걸으면 오늘의 목적지. 올라야 할 언덕이 미리 보이니 나도 모르게 각오를 하게 되었다. 언덕을 넘어야 해, 저 언덕을 넘어야만 해. 우리 인생에도 언덕들이 미리 보인다면 어떨까. 스무 살의 언덕 서른 살 혹은 마흔 살의 언덕들이...
두 번째 마을 자리키에구이를 지나 페르돈 고개에 도착하니 11시가 훌쩍 넘어섰다. 청동 순례자들과 사진 한컷을 찍고 비탈길로 내려서는데 고인돌 같은 돌비석들이 지역의 이름을 붙이고 둥그렇게 서있다. 독재에 맞서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태백산맥과 같은 대형 산맥을 다섯 개나 가졌으면서도 어디를 둘러봐도 뻥 뚫린 고른 땅을 가진 나라가 왜 이리 분쟁이 많았을까. 사람의 욕심, 잘못된 생각이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초래하는 일은 어느 나라라도 예외는 아닌가 보았다. 이후에도 그러한 분쟁으로 인해 죽은 이들을 기리고 있는 곳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언덕에 서 있는 나무 이정표에는 SEUL이 이곳으로부터 9,700Km라고 화살표로 보여주고 있었다. 베를린, 뉴욕, 시드니 등과 함께.
오르막 만큼한 평지까지의 하산길이 모두 자갈밭이라 잠시 주춤했던 발목, 무릎이 시큰시큰 통증을 보냈다. 걸음의 속도를 조금 낮추고 통증을 달랜다. 우테르가, 무르자발을 지나고 오바노스에서쯤 이미 앞서 보이지 않던 딸아이는 이정표를 놓치고 저만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역시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데 마을 사람인 듯한 이가 바른 방향을 알려준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어긋날 수밖에 없는 여정이었다.
23.4킬로미터를 걸어 푸엔테 라 레이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지난 4일간의 갑작스러운 걸음이 몸에 무리가 되었는지 허리가 심상치 않아 오늘은 짐 이동 서비스(donkey service)를 이용했다. 배낭 하나에 5유로. 썩 내키지 않았지만 아직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고 내키지 않은 일을 수용해야 할 때 더 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기꺼이 마음을 내려놓았다. 무엇보다 나를 위한 일 아닌가. 다만, 짐 옮김 서비스를 처음 이용하는 것이라 걱정이 많았다. 잘 도착할까, 혹시 오지 않은 건 아닌가, 다른 곳으로 잘못 가면 어떡하지.. 오만가지 불필요한 걱정들. 걱정은 해도 안 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니 이제 그만하자.
방을 배정받고 배낭을 풀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팜플로나에서부터 쌓인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양말에 수북이 묻어나는 먼지들, 최소한 깨끗하게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어차피 1,2층에 있는 화장실, 샤워실을 남녀로 구분해놓으면 더 나을 텐데. 침대는 왜 이리 삐걱거리는 거야. 주방은 또 지저분하기가 말할 수 없고... 어떻게 14년 전보다 더 못해? 중얼중얼 혼자 하는 말에 옆에 있는 딸아이가 '엄마 사립 알베르게도 많아 그리로 가면 돼' 한다. 맞다. 굳이 공립에 묵으면서 불만은 왜 이리 많은 걸까. 그래도 다시 나오는 불만. 많은 사람들이 걸으려고 오는데 공중화장실도 좀 설치해놓고. 짤순이 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루 전에 묵은 팜플로나의 공립 알베르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픈된 공간에 2층 침대만을 들여놓았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침대 앞에서 속옷바람으로 짐을 정리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아침에는 일어나 보니 바로 옆 침대에서 남녀 한 쌍이 2층을 비워놓고 혼자 쓰기에도 불편한 아래층 침대에서 같이 자고 있었다. 딸아이 보기에도 민망했는데 정작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이 또한 내가 아직 수용성이 부족한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자책했다. 청춘이니까 아프고, 청춘이니까 불편하고, 청춘이니까 철없을 뿐이라고.
어쩌면 14년 전 보다 더 나빠진 것이 내 성질머리였나 보다. 그때는 낯선 먼 길을 걸어와 지치고 고단한 몸을 누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었는데... 이 길에서 벼리고 다스리고 씻어내야 하는 것은 그동안 내 안에 검게 쌓인 불평불만이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