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3
2024년이 지나가기 전, 집 근처에서 M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이야기를 나누다가 감정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 대한 말까지 흘러갔다. M은 요즘 대학원에 다니며 들은 수업 중에 '감정'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고, 생각해 보는 작업이 참 좋았다며 내게 말했다.
"이번에 수업을 듣는데, 문득 우리가 감정에 충분히 젖어있었던 적이 있었나? 하고 물음이 들더라. 너는 충분히 슬퍼한 적 있어? 충분히 화를 낸 적은? 충분히 기뻐한 적은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고 젖어있는 게 힘들다고 하더라. 특히 슬픔에 대해서. 슬픔이라고 생각하면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잖아. 너무 슬퍼하면 일상생활을 못하잖아. 나약한 것 같고, 이겨내지 못하는 것 같고. 그래서 슬퍼하기도 전에 그걸 털어버릴 생각부터 하지. 생각해 보면 나도 충분히 슬퍼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M의 말이 정확했다. 나도 충분히 슬퍼해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2학년 때였나. 길에서 넘어져 크게 다치고 엉엉 울었던 이후로 한 번도 엉엉 울어본 적이 없었다. 굳이 울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울고 싶으면 혼자 방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울었다. 이불속에서 조용히. 엉엉 운 것도 아니고 눈물방울만 뚝 떨어지는 울음이었다. 정 울고 싶으면 일부러 유튜브에서 슬픈 영상을 찾아보거나 슬픈 영화를 보며 울었다. 그게 슬픔을 삭히는 방법이었다. 나는 내일 당장 출근을 해야 했으므로, 학교에 가야 했고, 공부를 해야 했고, 과제를 해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고, 처리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책임자의 역할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기에, 내게 울 시간이 없었다.
"나도 충분히 슬퍼한 적이 없었어."
내 고백에 M은 "우리 똑같잖아. 성격이.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이라서 그래."라며 앞에 놓인 앙버터 스콘을 반으로 똑 잘랐다. 하나씩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며 우리는 슬픔에 왜 푹 젖지 못하는지, 우리의 모습을 계속 되돌아봤다. 열일곱 살 때부터 서른둘이 될 때까지,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책임감을 한가득 짊어지며 보냈던 시간들을. 우린 그런 모양이었고, 이런 모양이 싫지 않았다. 우리에겐 강한 면이 있었기에 많은 일들을 헤쳐올 수 있었고, 약한 면들은, 우리 안에 숨겨진 약한 면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보듬고 털어냈다. 털어내고 다시 일어났다. 찔끔 눈물 한 방울 흘리면서.
M은 충분한 슬픔에 정화 기능이 있다고 했다. 죽음에 충분한 애도 기간을 가져야 하듯이, 충분히 슬퍼하는 시간을 가져야 회복도 하고 다시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고. 나는 충분히 슬퍼할 때, 엉엉 울지 못할 것 같다고 그랬다. 지금처럼 조용히 뚝뚝 흘리면서 충분히 슬퍼할 것 같다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소리치는 울음이 아니라 조용한 울음으로 슬픔을 보낼 것이다. 다시 충분히 기뻐할 날들이 오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