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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조각

2025.01.12

by 김채미


'행동'과 '주체성'이라는 단어가 2024년 말부터 2025년 시작까지 대두되고 있다. 계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시국과 마음 쓰린 참사와 엇물려 일어나는 사회 곳곳의 현상들이 유독 이 두 단어를 내 마음에 품게 만든다. 행동하는 사람은 어떻게 발현되는 걸까.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빛을 내는 건지. 이전까지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저, 그래 그럴 수 있지, 어떻게 모든 사람이 같겠어, 각자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이라고 마음속에서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고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계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건과, 이에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말도 안 되는 행태를 부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럴수록 올바른 행동을 하고 올바른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필요하고, 작은 행동이라도 보태는 것이 삶이 아닐까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수동적 인간으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주체적 인간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학문을 공부하는 이유이고, 철학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살아가는 이유다.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의 삶은 풍요롭지 못하다. 끊임없이 인간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구조와 사회에 저항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고 예술이지 않을까.


어제 본 영화 <위키드>와 12월에 본 연극 <타인의 삶>이 이어졌다. <타인의 삶>을 보고 나오면서 사람들이 모두 이번 사태와 묘하게 엇물리는 게 참 신기하고 재밌다라며 박수를 쳤다. 동독에서 첩보원으로 일을 하는 비즐러는 작가 게오르크의 집을 도청하면서 점차 그의 삶에 젖어들게 된다. 그전까지 스파이를 잡는 일에 혈안이어서 냉혈한이라고 불렸던 이가 게오르크가 살아 숨 쉬는 집에서 보여주는 사랑, 우정, 열정, 용기, 양심에 반응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즐러는 게오르크를 통해 양심과 정의가 무엇인지,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스스로 번뇌하고 고민한다.


영화 <위키드>에서도 비즐러와 비슷하지만 다른 녹색 마녀 엘파바가 나온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피부색이 녹색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만, 훗날 밝혀진 오즈의 정체와 부조리를 세우고 질서를 흔드는 마담 모리블에 대항하여 악한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스스로 오즈를 떠난다. 마지막에 엘파바가 부르는 노래'Defying Gravity'에서 '나는 한계가 없어, 스스로의 길을 개척할 거야.'라고 말하며 부조리에 맞서고 자신의 양심에 반응하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다. <타인의 삶>의 비즐러와 <위키드> 속 엘파바 모두 양심에 따라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 길이 비록 험난할지라도.


광장에 나온 빛을 든 수많은 사람들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추위에 온몸을 떨고, 휴일까지 반납하며 차가운 거리 위에 손을 잡고 빛을 들어 올린 이유는, 내 양심에 따르겠노라는 삶에 대한 엄숙한 선언이다. 비록 추울지 언정, 내 양심의 소리는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그게 삶이라는 것을 실현하고 보여주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다. 양심에 따라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그리고 그걸 글과 작품으로 실현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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