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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는 돌고 돌아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by 김채미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보니 탑승 시간까지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남아있었다. 딱히 살 건 없지만 면세점이나 돌며 시간을 보낼까 하다가 요즘 그렇게 재밌고 인기가 많다는 폭삭 속았수다 한 편만 볼까란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면세점에 가봤자 사고 싶은 건 없을 테고, 돌아도 한 시간을 넘게 채우지는 못할 테니. 나는 공항 와이파이를 잡고 콘센트가 있어 핸드폰 충전이 가능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혹시 몰라 비행기 안에서도 영상을 볼 수 있게 다운을 받은 후 영상을 재생했다. 그리고 나는 홍콩 공항 안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집으로 향하는 공항철도 안에서, 우리 집 근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빠를 바라보며 펑펑 울었다. 종일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 드라마를 봤다.


나는 한동안 출근길과 퇴근길에서 사연 있는 여자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거 CJ용 상업 영화잖아, 단골 주제잖아, 앞으로 어떤 사연이 나오고, 어떤 일이 펼쳐질 걸 알잖아, 그런데 왜 우냐, 바보냐.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어도 눈물은 쏟아졌다. 다 아는 내용이어서. 애순이 자기 엄마에게 무얼 바랐고, 자기 딸에게 무얼 바라는지 알아서, 맏딸인 금명의 마음이 다 이해되어서, 금명이 엄마에게 왜 투정을 부리는지, 왜 우는지 다 알아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가 금명이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나를 기다리고, 기대를 하고, 그러면서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고, 다 퍼주고자 했던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생생해서 마스크를 눈까지 올리고 싶었다.


"엄마가 뭘 알아. 기대가 얼마나 부담스러운데. 나도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런데 죄책감을 버릴 수 없는 걸 어떡해. 엄마가 회사는 다녀봤어?" 철없게 엄마에게 가시 박힌 말을 쏟아내는 금명이를 보고 나는 욕할 수 없었다. "엄마가 회사를 다녀봤어?"라는 말을 나도 철없던 시절에 몇 번이고 쏟아냈기 때문이다. 늦께까지 야근을 한 다음날에도, 몸살이 걸려도 울면서 회사에 출근했던 사회 초년생 시절, 그럼 하루 쉬고 출근하라는 엄마 말에 나는 매섭게 쏘아붙였다. 신입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마음대로 쉬어, 라면서. 그럼 엄마는 바보같이 배시시 웃으면서, 그래? 많이 힘들어? 주말에 맛있는 거 먹자 라며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금명이처럼 더 크게 화도 내고 울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울지도 못했다.


왜 나도 엄마랑 아빠 앞에서만 그렇게 감정을 터트렸을까. 밖에서는 모범생이자 온순한 성격이자, 모임의 장이자 똑부러지는 아이인데. 왜 엄마 아빠 앞에서는 아직도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고 가끔 눈물을 보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언제나 회사나 학교에서 눈물이 날 일이 있어도 꾹 참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 앞에서 찔끔 눈물을 흘렸다. 안도와 함께 투정을 부리고 싶어서. 마음 저편에 숨 쉴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믿음이 지치고 고되어도 아침 일어나 출근을 하게 만들었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를 보면 참 다양한 관계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과거에 이어진 인연이 현재에 도움을 주고, 우연한 만남과 도움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보여준다. 관계는 그렇게 돌고 도는 게 아닐까. 내가 부모님과 동생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 것처럼, 반대로 나도 부모님과 동생에게 나도 모르는 어떤 의지와 믿음을 주고 있을 것이다. 친구들, 직장 동료들, 친척들, 이웃들, 오고 가는 인연들이 하나의 순환이 되어 생명력처럼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순환 속에서 우리는 점차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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