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지성사 시의 말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요즘 너무 바빠서, 얼마 전에 인상 깊게 읽은 시인의 말 모음집 강동호 문학평론가의 발문을 올린다!
법정에서의 증언과 시적 증언이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지점도 여기입니다. 법정 증언이 철저히 과거의 진실에 대한 것이라면, 시는 과거나 현재에 관해 말하는 순간에도 이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미래의 타자를 향해 말을 건넵니다. 시가 증언하는 미지의 진실이, 알려지지 않은 시간, 도래하지 않은 시간으로서의 미래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적합한 시제를 부여받지 못한 미정형의 시간을 향한 집중 속에서 시는 예측하지 않고, 예견하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향해 말을 건네고, 미래를 향한 증언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 증언의 메시지를 우리는 희망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의 말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가 비관주의적 전망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시의 말이 현실에 자주 절망하고, 절망의 고통을 자신의 육체로 보여주는 일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 고통이 끝내 소진시킬 수 없을 인간의 존엄과 역량 속에서 어떤 진실을 보았음을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은 철저하고도 냉정한 비관을 경유해야만 겨우 만날 수 있는 미지의 희망, 결코 소멸될 수 없는 진실의 다른 이름입니다. 시인이 자신의 언어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를 나지막이 지켜본다는 말은, 그것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누군가의 삶에까지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단단한 긍정과 신뢰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미래를 향해 시가 건네는 희망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음을 증거 하며, 여전히 인간에 대한 믿음이 포기되지 않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그 증언의 진실성을 신뢰하는 증인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시의 말이 촉구하는 진실에 대한 비전과 함께 시는 우리를 끌고, 기어이 미래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의 말이 증언하는 저 알려지지 않은 시간의 "어디에선가", 어떻게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강동호 <미지를 향한 증언-문학과 지성사 시인의 말 발문>
평화 앞에서 사람이라는 인종이 제 종을 얼마든지 언제든지 살해할 수 있는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종은 '살기/살아남기'의 당위를 자연 앞에서 상실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 한 도시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한 세상을 그곳에서 살고 그리고 사라진다는, 혹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이 롱 뒤레의 인식이 비극적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적인 그리고 자연적인 비극이다. 그러므로 그 비극은 비극적이지 않다.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뒤표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