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어제 첫 출근을 했다. 방문을 열어볼 때마다 침대에서 시체 놀이를 하던 아이에게 취업에 대해 압박을 하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이 몇 달간 지속한 후였다. 급한 저녁 약속으로 밖에서 식사하던 중 궁금해서 집으로 전화를 해보았다. “잘 들어 왔어? 표정은 좀 어때? 지쳐서 쓰러져 있나?” 별 특이 사항이 없다는 와이프의 대답을 듣고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취업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매우 의미 있는 터닝포인트이다. 아이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서서히 자라난 둥지를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부모는 행여 첫 날갯짓이 서툴러 다치거나 쉬이 지치고 상심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지켜보게 된다.
사람의 인생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면, 태어나서 부모 품에서 살던 미혼 시절(나의 경우 잘 씻지도 않고 한량같이 귀가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원시인이었다), 결혼하여 품 안의 자식과 알콩달콩 사는 시기(잠을 자기 전에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습관화되는 과정), 자식을 분가시키고 배우자와 맞이하는 ‘다시 신혼’ 시기(온 집을 반짝반짝 광을 내는 걸레질의 달인이 되어가는 단계)이다. 실제로 어머니는 결혼 날짜를 잡은 날 아내에게 “얘는 안 씻으려고 하니 잘 씻기면서 데리고 살아라, 배고프면 화를 내니 맛있는 것 할 생각하지 말고 빨리 입에 뭐라도 들어가게 하면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3단계로 구분된 인생에서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들게 된, 올바른 짝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나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이라 할 수 있다. 현역 입학이니 21세이고 대학 3학년이었던 1989년. 정치는 혼란스러웠지만 캠퍼스의 공기는 낭만이 차고 넘치는 참 좋은 계절 사월이었다. 학교 동아리 선배가 여자 후배에게 첫눈에 반해서 마냥 쫓아다녔는데, 좀처럼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지자 소개팅 행사를 빙자하여 그만을 위한 작업 시간을 확보하였고, 와이프와 나는 그런 상황을 연출하는데 필요한 조연이자 들러리였다.
대구 여성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던 터라 예쁜 대구 사투리를 연신 발사해대는 영문과 여학생에게 빠져드는 것은 이미 정해진 길이었는지 모른다. 남자 셋 여자 셋 모두 6명이 함께 차 마시고 이대 앞 디스코텍에서 몸을 흔들어 대고, 어느 개그맨이 운영하는 바에 앉아서 하루를 마무리할 무렵 이미 ‘Go, No Go’가 어슴츠레 정해지기 시작했고 우리 커플은 ‘아마도 Go’ 수준으로 마무리를 하고 헤어졌다. 그러다가 며칠이 흘러 캠퍼스 본관과 옆 건물 사이에 좁은 통로(건물에 막힌 바람이 이 통로로 더 빠르게 지나가서 학생들은 이곳을 ‘폭풍의 언덕’이라 불렀다)에서 마주쳤다. 그렇게 마주친 5초 정도, 마치 로맨스 영화의 슬로비디오 같이 흩날리는 그 여학생의 짧은 머리와 아름다운 미소. 내가 먼저 말했다.
“우리 오늘 수업 끝나고 잠깐 볼까요?“
”네~, 어디서 볼까요?“
1초도 머뭇거리지 않은 질문과 0.5초도 기다리게 하지 않는 대답이 오고 갔다. 그 이후 우리는 전형적인 상경대 남학생과 문과대 여학생으로 구성된 캠퍼스 커플이 되었고, 사랑하는 학우들의 면학 분위기를 풍비박산 내는 고슴도치가 되었다.
내가 아니지만, 나만큼 사랑하게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 진기한 경험이다. 당시 유행가 가사가 전부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고, 이 세상 아름다운 꽃도 우리를 위해 피어난 것 같았다. 해와 달마저 우리 커플을 중심으로 도는 것 같았으니까 말 다 했다.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30년이 지나고 우리 부부는 ‘다시 신혼’을 앞두고 있다. 딸아이가 언제 분가를 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딸아이가 출근한 이후 더는 직장을 다니지 않는 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폭풍의 언덕에 서 있는 그녀의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다시 슬로비디오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