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행궁동 밤거리, 굿바이
저녁 식사 후 아내와 적당한 시간의 세상 이야기가 끝난 머리 염색을 해주었다. 3주마다 해야 하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외출을 꺼리다 보니 6주가 되었대나. 내가 염색약을 들고 아내 앞에 섰다.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아내의 머리에 하얗게 꽃이 핀 것은 세월이 묻어난 게 아니었다. 내가 불면의 밤을 보내게 해서일 거다. 모든 것들이 지난 간 뒤 아내의 흰머리를 보면 마음이 애잔하기 그지없다. 최근 들어 함께 좋은 시간을 못 보내서 많이 미안한 마음을 정성 어린 섬세한 염색약 터치로 대신했다.
이윽고 바흐가 피아노 선율을 타고 흐르는 밤 9시 59분. 기계식 키보드의 차각차각하는 소리를 들으며 리듬감 있게 글을 쓴다. 몇 년이 지난 후 오늘 밤을 떠올리게 될까? 커다란 프로젝트에 어울리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앗아갔던 준비과정이 허탈하게 끝난 후 바흐를 듣고 있노라니 공허함이 에스프레소 더블샷같이 찐하게 파고든다.
연구실 식구들과 지난 12월 어느 추운 날 밤, 독거노인분들 초대해서 저녁 대접하고 나오다가 몸을 녹힐 겸 커피 한 잔 하고 헤어지려 급히 찾아 들어갔던 곳이 터키식 커피 전문점이었다. 차를 덖는데 쓸법한 커다란 주물 무쇠솥 같은 것에 수북이 담긴 뜨거운 모래에 빈 황동 잔을 자리 잡게 하고 그곳에서 커피를 가열했다. 한 모금만 마시면 강력한 각성효과가 전해져 오는 매우 터프한 스타일이었는데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커피가루를 미숫가루 타듯이 진하고 질퍽하게 섞어놓았기 때문이다. 여과과정이 없어서 커피 가루가 입안으로 그대로 넘어오니 커피를 세잔 정도 연거푸 마신 느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 연거푸 슬픔이 밀려오거나 실패감이 나의 온몸을 지배할 수 있다. 문제는 Growth Mindset이 작동하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떨어져서 더 많이 배우는 것은 교과서에만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다. 오늘 밤에는 혀를 델 것 같은 열기와 강력한 카페인이 내 몸을 휘감더라도 내일 아침에는 또다시 태양이 뜰 거고 내가 그 주인공이 될 거니까.
그날 밤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터키식 커피 전문점 12월 26일 밤 10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