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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이슬 Nov 09. 2023

[번외] 한라산을 한번 올라가 봤는데요...

우리가 정복할 것은 산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버킷 리스트까진 아니지만, 언젠가 한 번, 딱 한 번 해본다면 좋겠다 막연히 생각하던 일이 있습니다.

(제 버킷 리스트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누워 낮술 하는 것과 미터급 참다랑어를 잡아 소주 한잔하는 것 정도가 있겠습니다...)


바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한라산 정상에 한번 올라가 보는 것인데요.

산을 오르며 인생을 고찰하고 자연의 위대함과 한반도의 정기를 느껴보는... 그런 원대한 목표는 없었습니다.

아마 정상까지 케이블카가 있었다면 그걸 탔을 겁니다...

아무튼 그냥, 그래도 한국인이라면 체력이 될 때 한 번쯤? 정도의 가벼운 마음가짐이랄까요.


원래는 뽀로로즈와 함께하려 했는데, 태국에, 일본에 여러모로 다들 연차를 잔뜩 소진한 터라 아쉽게도 이번엔 함께하지 못했습니다(뽀로로들아! 보고 있지? 내년 봄에 가보자고~!).


근데 진짜 뽀로로들과 갔으면 큰일 날 뻔한 게,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거든요...

뽀로로즈에선 제가 최연장자라 아마 낙오했을지도...

아무튼, 선발대 느낌으로 제가 먼저 친구들과 다녀왔습니다.

아직 일주일도 안 된, 따끈따끈한 이야기랍니다. :)



제주도 도착!


직장인인 관계로, 주말을 이용해 후다닥 다녀왔습니다.

제주에 도착해 한라산 등반에 특화된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을 하고(탐방코스 입구까지 픽업, 장비 렌트 등 여러모로 한라산에 특화되어 있는 게스트하우스가 제주엔 여럿 있습니다)

다음 날 새벽부터 등산해야 하므로 든든하게 고기, 그리고 빠지면 또 너무 서운하니까 한라산 소주도 딱 한 잔만 했습니다. 진짜로.

저희는 여러모로 게스트하우스에 불만족했는데, 이건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혹 한라산 등반을 계획하고 계신다면 잘 찾아보고 가셔요!


참고로 전, 태어나서 이렇게 높은 산은 처음 가봤습니다. 애초에 등산을 싫어하기도 하고, 운동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가끔 급다이어트할 때만 간헐적으로 한 달 정도 러닝을 하긴 하는데 그때 빼곤 운동이라곤 전혀...

등산 장비도 전혀 없어 게스트하우스에서 전부 빌렸고요.

평일엔 한 1,000걸음이나 걸으려나요... 찾아보니 그것도 안 되네요.^^

말 그대로 등산 왕왕왕왕초보입니다.


평일 직장인의 걸음 수.jpg


아니 그런데 한라산 등산 후기를 찾아보니 대부분 시간이 오래 걸려서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그렇지 가파르거나 난도가 높은 산은 아니라는 글이 많았는데요. 분명 초보, 등린이 이런 키워드로 찾았는데 말이죠...

전 진짜 너무 힘들었습니다... 등린이 왕초보는 하루 1,000보도 걷지 않는 저 같은 사람을 기준으로 잡아주세요 여러분... 그리고 경사가 없긴 무슨 절벽에 바위에 무식하게 경사 진 계단에 난리입니다... 속지 마세요...



아무튼. 여섯 시 반, 성판악 코스로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진달래밭 대피소까진 두세 시간쯤 걸린 것 같은데 사실 이때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날이 워낙 흐리기도 했고, 이때부턴 비도 꽤 내리기 시작했는데요.

놀랍게도 이때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스니커즈 두 알 먹은 게 전부...

아침에 샌드위치 한 쪽 먹고 출발하긴 했습니다(편의점에서 파는, 두 쪽 들어있는 그것).


게다가 딱 5분만 쉬었습니다...!




왕복 9시간 소요는 누구 기준인가요... 다시 산정해 주시길 관계자분들께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비바람에 천둥까지 치더니만 결국 11시 무렵부터 입산 통제더라고요.

물론 저흰 오르느라 바빠서 하산하고서야 확인했지만요.

(11시엔 이미 정상을 찍은 뒤라 저희랑은 상관없는 통제였습니다)



운무가 끼어 꽤 운치 있던 한라산.

정상까진 4시간이 채 안 걸렸습니다.

제 체력이 좋거나 뭐 그런 건 아니고, 동행한 친구 중 한 명은 운동 트레이너고 한 명은 운동에 미친 헬*이었기 때문인데요.


지들끼리 맘대로 절 가운데 배치하더니만 앞에서는

"회원님! 할 수 있습니다! 멈추면 안 돼요! 다 왔어요 다 왔어!"(정상까지 3시간 남았을 때도 ㅡㅡ)

뒤에서는

"회원님 멈추면 안 됩니다. 킵고잉 킵고잉! 할 수 있다! 쉴 때도 멈추면 안 됩니다. 아주 천천히라도 움직이세요. 물 그렇게 벌컥벌컥 마시면 안 됩니다. 퍼집니다. 힘드십니까? 1분 쉽니다. 다리 푸세요."


이 지읒... 아오... 험한 말 심한 말... 한라산에 가서 욕이 늘어 왔습니다. :)

정말 가만히 멈춰있는 꼴을 못 보더라고요.

어쨌든 앞뒤로 그렇게 시끄러웠기에 망정이지 혼자였다면 중도포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상에서 허세샷 한 컷. :)

성판악 코스 정상 직전이 개인적으로 제일 힘들었는데요.

비바람이 숨 쉬기 힘들 정도로 몰아치는 데다가 절벽 같은 지형이라 걸음 떼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초보자는 등산스틱 꼭 챙겨가세요...

필수가 아니고 선택이라는 글이 많던데, 필수 맞습니다... 제발 가져가세요...!!!!


그리고 산은 정복하는 게 아닙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지켜주세요...!


지상은 참 맑더군요... 무지개까지...


내려올 때도 4시간 정도 걸렸습니다(관음사 코스).

이때는 웃음을 잃고 두 트레이너들의 멱살을 잡을 뻔했지만 다행히 대피소에서 라면 정도는 먹게 해주더라고요. 20년 넘은 친구들인데 한라산에서 절교할 뻔...



내려오니 정말 도가니가 박살이 났길래 도가니탕을 먹어주었습니다.

내 도가니가 다른 도가니로 채워지길 기원해 보며...





이날의 걸음 수.

돌아와서 파스 5개 붙이고 잤습니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끙끙대며 걷고 있지만,

사람이, 기억이 참 간사한 게

힘들었던 기억은 어느 정도 사라지고, 성취감만 남더라고요.

그리고 날이 흐려서 보지 못한 백록담에 대한 아쉬움.

날만 좋았다면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그래서 봄쯤에 한 번쯤 다시 가볼까 싶은 요즘입니다.

날 좋은 날, 쉬엄쉬엄 충분히 쉬면서 간식도 먹고 하면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요?


물론, 뽀로로즈 매거진 발행을 위해 뽀로로들과요. :)

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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