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시간에 종종 전체 교직원 회의가 소집되곤 했다. 과학실이나 식당에 학교 구성원 전체가 모였다. 50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할 일도 많은데 의례적이고 비생산적으로 모여있어야 하는 그 시간이 항상 아까웠다. 그 날도 회의가 제발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며 어쩜 학교는 여전히 이렇게 구시대적으로 굴러가는지 속으로 욕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문 잠가”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회의를 시작하기로 한 정각이었다.
문이 잠겼고 교사 한 명이 미처 들어오지 못했다. 고함을 친 사람은 교장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했다. 교장은 준비된 마이크에 대고 회의 시간도 못 지키는 교사는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했다. 문을 잠근 채 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의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일방적인 훈계가 이어졌다. 회의 때마다 매번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제 절대 회의 시간에 늦는 교사는 없었다. 어느 날은 교사 한 명의 이름을 불러 세워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었다. 어느 날은 이렇게 회의 시간에 한 마디도 스스로 못하는 교사들이 ’민주‘는 잘만 외친다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전형적인 괴롭힘 수법이 동원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결재 서류가 올라오면 어떤 코멘트도 없이 놔둔다. 반려하지도 않은 채 그냥 내버려 둔다. 일을 빨리 진행해야 하는 교사는 교장의 의중을 있는 힘껏 파악해 서류를 다시 올린다. 몇 번 같은 과정이 반복되고 드디어 교장의 뜻에 맞는 덕지덕지 수정한 결재 안이 살아남는다. 차별이 대놓고 이루어진다. 회의 시간에 한 명을 일으켜 박수를 쳐주고, 바로 다음에 다른 한 명을 일으켜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내 이름이 불렸을 때 내가 칭찬을 받을지, 비난을 받을지는 알 수 없다. 법에 명시된 권리를 누리기 불편하게 만든다. 수업 후 사정이 있어 조퇴를 하려면 결재를 받은 후 교장실에 ‘조퇴 인사’를 가야 한다. 교사들은 올해만 무사히 넘기자며 무력해진 채 저항하지 않았다. 멍든 마음으로 아이들 앞에 섰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2박 3일짜리 교직원 단체 여행에 주말을 반납해 참가해야 한다. 사정이 있어 참가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사유서를 제출해야 하고 당분간 모진 차별을 겪을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게 거의 전참에 가까운 출석률을 보인 교직원 여행에서는 술시중을 들어야 하고 노래방에 가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교사들의 주머니에서 각출된다. 회식도 빼놓을 수 없다. 또다시 반복되는 술시중과 노래방과 각출. 그 하루의 끝에는 반드시 누구 한 명이 이 모든 촌극의 주인공을 자택까지 안전하게 운전해 드려야 한다.
모든 학교가 이렇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제재 없이 돌아가는 학교가 있다는 사실이 교직에 대한 희망을 놓게 했다. 교장으로 승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최소한의 자격은 있는 교장과 일하고 싶었다. 모두가 미웠다. 처음에는 부역하는 교감들이 미웠다. 비위를 맞추려 경쟁하는 동료들이 미웠다. 거기에 동조하는 내가 제일 미웠다. 차마 적을 수 없는 만행들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목격자일 때도 있었고, 방관자일 때도 있었고, 피해자일 때도 있었다. 그를 견제할 사람이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교육청에 도움을 요청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교육청에서 우리가 보낼 구조 신호를 받을 사람은 장학사였다. 경험 많은 한 선배 교사가 회의적으로 말렸다. 장학사는 교감과 직급이 같다고. 그들이 교장을 두고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오히려 공포 통치에 정당성을 주는 일이 될 것이라고.
사직서를 내느냐 마느냐로 한참 고민이던 겨울 방학 중간에 나는 다음 학년도의 1학년 담임으로 결정되었다. 곧바로 입학식 준비를 시작해야 했고 없던 사직서를 낼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새 학기 3월이었나, 4월이었나. 1학년 아이들과 ‘벚꽃 엔딩’ 뮤직 비디오를 만들던 무렵에 경찰인지 검찰인지 모를 사람들이 교무실과 교장실의 컴퓨터를 떼어 갔다. 교사 몇 명이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다는 말이 들렸지만 누가 불려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참고인으로 불려 가게 될 상황을 기대하기도 했고, 진짜 그렇게 될까 봐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내가 보고 겪은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고 하나라도 더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자진해서 참고인으로 출두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그 후 교장은 직위해제되었고 2학기에는 새로운 교장이 왔다. 그는 결국 같은 지역 다른 학교의 교장으로 전근 조치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년을 맞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