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참깨 Sep 03. 2023

그저 나는 가장 운이 좋은 교사였을 뿐


 다행히 아이들과의 관계 쌓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문제가 생겨도 그때그때 해결이 가능했다. 교우 관계에 예민했던 여자 아이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어주다 보니 이제 아이들은 거의 매일 돌아가며 자진해서 상담 신청을 했다. 개별 상담을 하고 싶다고 하기도 했고, 트러블이 있는 친구를 데리고 와서 내게 시간을 내어주길 요청하기도 했다. 시간 관계상 하루에 한 팀만 상담하기로 정한 이후부터는 아이들 스스로 상담 스케줄을 조정하기도 했다. 담임으로서는 초짜였지만 13세 아이들이 보기에 나는 ‘여자 친구들과 잘 지내기’ 분야에 있어 베테랑이었다. 내가 교우 관계 속에서 연마한 들어주기, 함께 안타까워하기, 맞장구 쳐주기 등의 기초 권법을 사용했을 뿐인데 아이들은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다 쏟아내고 나서는 이제 된 것 같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내게 어떤 답을 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래 공을 들여야 했던 여자 아이들에 비해 남자아이들의 경우는 운이 좋게 해결이 되었다. 수업 시간에 남자아이들은 자주 실없는 농담을 했다. 나는 적당히 그들을 무시하거나 경고를 담은 미소를 날리고는 다시 수업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 명의 농담에 내가 빵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와, 이번 건 진짜 웃겼어”라는 마음의 소리를 내뱉어버리고 말았다. 나의 의도치 않은 빵 터짐이 칭찬으로 들렸는지 그 뒤로 예상치 못한 전개가 펼쳐졌다. 아이들은 영민하게도 내가 그 순간에 왜 웃을 수 있었는지를 알았다. ‘수업과 관련 있는 농담이면서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하지 말 것,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한 수위로 치고 들어왔다가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것’. 그때부터 아이들은 고도의 균형 감각과 센스를 갖춘 농담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선을 넘는 농담에는 자체 비난이 쏟아졌다. 말수가 적던 아이들은 가끔 용기를 내보기도 했다. 아이들은 진짜 유머가 무엇인지 스스로 배워갔다. 수업에 시간에 활기가 더해졌다. 위대한 선순환이었다.


 교실에서만큼은 무탈 이상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하루하루가 재미있게 흘러갔고, 아이들의 에너지를 받아 수업 구상도 더 과감하게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만족을 느끼는 나와는 다르게 학년 회의 시간에 마주하는 동학년 선생님들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학교 안과 밖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쳤고, 수업을 방해했고, 무례하게 굴었다. 학부모들의 민원인지, 협박인지 모를 발언들이 있다 했다. 학부모 위원을 하던 한 학부모는 ‘교장 선생님께 이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도 했다.


 회의 시간에 한숨 섞인 교실 이야기들이 오갔다. 위로와 조심스러운 조언이 있었지만 누구도 직접 도울 수는 없었다. 도움을 받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담임 주도 체제로 돌아가는 학교에서 담임들은 결국 각자도생 방법밖에는 없다고 체념하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눈치껏 우리 교실을 숨겼다. 나 나름의 각자도생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의 고충에 적당히 맞장구쳤지만 우리 반이 어떤지 잘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전부 5층에 있던 6학년 교실과 동떨어져 아래층 꺾인 복도 끝에 외따로 있던 우리 교실의 위치는 이런 내 전략을 더욱 용이하게 했다. 폐쇄적이라는 초등학교 교실의 특성을 이용했다. 나와 우리 반 아이들만 잘 지내면 된다고, 내 책임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동학년 선생님들을 인간적으로 좋아했지만 그들이 교실에서 정말 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졌다. 당시 나는 1년도 채 되지 않는 티끌만큼의 경험을 전부로 아주 큰 착각을 품고 있었다. 나는 ‘내가 유능하기 때문에’ 우리 반이 잘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반항을 한다면 교사와의 라포 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학부모 민원이 많다면 교사의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생각은 ‘교사가 잘하면 교실이 잘 된다’는 위험한 일반화로까지 이어졌다. 누구 하나 미운 아이가 없었고, 아이들은 실수를 하더라도 곧 바로잡히곤 했다. 영어와 과학 교과 수업을 해 주시던 전담 선생님들이 종종 우리 반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일으키는 문제 행동들을 알려주기도 하셨지만, 나는 그 말조차 제대로 듣지 않았다. 내가 보는 아이들은 대체로 옳았으므로, 선생님들의 평가를 흘려버렸다.


 다른 학년 선생님들과도 인사를 하고 지내게 되었을 무렵, 우리 학년이 사실은 6년 내내 학교에서 대대로 가장 힘든 학년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기존 선생님들은 아무도 6학년에 지원하지 않았고, 전입 교사와 신규 교사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신규가 그런 학년을 맡아 힘들겠다‘는 걱정 어린 위로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학기 말 즈음에는 어느 학부모가 내년에 자신의 아이 담임으로 나를 지정해 달라는 로비를 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 학부모의 요구는 선을 넘었고, 내 오만함은 경계가 없었다.


 1년을 마무리하는 교직원 전체 회식 자리에서 작년에 5학년 부장을 하셨던 선생님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 학년 아이들의 반 배정을 책임졌던 분이다. “선생님, 고생 많았지? 그래도 그 반은 좀 낫지 않았어? 그 반에 A 있잖아. A가 어지간히 걱정이 되어야 말이지. 그래서 그 반에 A 괴롭힐만한 애들은 하나도 안 넣었잖아. 조금이라도 문제 일으킬 것 같은 아이들은 우리가 다 다른 반으로 뺐지. 그래도 6학년 애들 사춘기 와서 쉽지 않았을 거야……” A는 우리 반의 특수교육 대상 아동이었다. 6학년 전체에 특수교육을 받는 아이는 A 딱 한 명이었다. 진실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저 가장 운이 좋은 교사였을 뿐이다.


https://brunch.co.kr/@chamkae/143




이전 08화 세 명의 신규 교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