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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깨 Sep 17. 2023

차라리 나쁜 교사가 되세요, 죽지 마세요


  학교가 각종 민원으로 몸살이다. 누가 보아도 민원 거리가 아닌 민원부터 교권을 유린하는 민원, 상습적 민원, 보복성 민원이 들끓는다. 그러다 보니 정작 진짜 민원이 필요한 사람은 악성 민원인으로 낙인찍힐 것이 두려워 참고 넘어가는 일도 발생한다. 민원을 받는 교사들도 쏟아지는 민원에 지쳐서, 민원이 두려워서, 혹은 민원에 둔감해져서 종종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대처를 하기도 한다.


 가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강력한 민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피력하는 부모님들이 있다. 그런 부모가 흘리듯 말하는 ‘내 직업이 ㅇㅇ입니다’, ‘교장선생님과 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희 아이가 유달리 특별합니다’, ‘믿고 지켜보겠습니다’ 등과 같은 말은 ’제가 곧 미래의 민원인입니다‘라는 선언이다. 그런 말 한 마디가 압박이 되어 교사는 자율적으로 교실을 운영하기 어려워진다.


 같은 학교에 재직하던 선생님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이가 교실에서 바지에 큰 볼일을 실수하는 일이 생겼다. 하필이면 잦은 민원으로 매해 담임들을 속앓이 하게 하던 부모의 아이였다. 평소 같았으면 학교에 여분의 옷이 있는지 알아보거나, 여의치 않으면 부모님에게 연락을 취해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는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선생님은 어떤 조치를 취해도 부모의 민원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지레 겁을 먹은 나머지 담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를 고민했다.


 선생님은 아이를 데리고 아이의 집으로 갔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이었기에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은 아이를 화장실에서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다시 학교로 데리고 왔다. 그동안 학급은 다른 선생님에게 부탁했다.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한 선생님은 그 정도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선생님의 착각이었다. 선생님은 곧바로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부모의 허락 없이 교사가 집에 들어왔다는 민원이었다.


 나는 그 선생님의 대처에 동의할 수 없다.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간 것도, 집에 들어간 것도, 아이를 직접 씻긴 것도 모두 석연치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왜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과잉 친절을 베풀었는지는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학교에서 뒤처리를 도왔다면 그 과정에서 아이의 수치심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민원을, 부모님에게 연락을 취했다면 맞벌이하는 부모를 오라 가라 한다는 민원을 받을 것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어떤 조치를 취하더라도 예민한 부모님의 심기를 건들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결국 민원이었다. 위축된 교사의 과잉 대응이 불러온 웃지 못할 참사다.


 민원에 시달리는 교사들은 위의 사례와 정확히 반대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체육 수업 시간에 다친 아이 부모의 민원을 받은 한 교사는 그때부터 실외 체육을 완전히 중단했다. 체육을 운동장에서 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므로 체육 시간에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아이들은 교실에서 ‘앉아서 할 수 있는’ 간단한 놀이를 하기도 하고 체육을 ‘글로’ 배우기도 한다. 더 이상의 민원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회피 전략이다.


 쉬는 시간에 안전사고가 나면 교사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한다는 것을 몸소 배운 교사는 쉬는 시간을 없애기도 한다. 수업과 수업 사이 10분의 시간 동안 수행할 과제를 주기도 하고, 책만 읽히기도 하고, 허락을 받고 화장실에 가는 것만 허용한다. 주로 쉬는 시간에 벌어지곤 하는 아이들끼리의 다툼, 복도에서 뛰다가 발생하는 안전사고 등이 미연에 방지된다. ‘무탈과 무사‘를 지상 목표로 한 교실에서 아이들은 쉴 권리를 박탈당한 채 1년을 보내야 한다.


 교사들은 아무런 필터도 거치지 않은 민원을 홀로 받아내야 한다. 민원이라는 이름의 폭언과 협박도 빈번하다. 학교는 교사를 보호하기는커녕 교사를 방패 삼아 그 뒤에 숨는다. 그러다가 교사는 절대 ‘잘했다’는 평가를 들을 수 없는 악수를 두기도 한다. 이기적인 교사가 되는 대신 안위라도 얻는다.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체육 시간과 쉬는 시간에 아이들을 앉혀만 둔다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정말 나쁘다’고 비난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들이 죽음을 택하지 않은 것만은 정말 잘했다고, 다행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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