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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깨 Aug 29. 2019

육아생활자 수기3. 쉽게 키워도 괜찮아



D+194


‘네모난 방을 동그랗게 닦을 것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임신기간에 정주행한 일드에서 접했다. 이 표현이 꼭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아 뜨끔했고,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청소포로 바닥을 훔칠 때 정말 그렇다. 오늘 모든 곳에 청소포가 닿지 않더라도 매일 하다 보면 거의 모든 곳의 먼지가 제거되겠지!라고 생각하며 바닥을 닦는다.


엉성한 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하다. 훈기 초음파 사진은 아직도 정리를 못한 채 책장에 꽂혀 있고, 점점 옷장이 아닌 건조기에서 마른 옷을 꺼내 쓰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훈기가 100일이 되면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어주겠다던 다짐은 어느새 희미해져 있다가 방금 다시 떠올랐다. 훈기가 내가 만든 이유식을 잘 먹지 않아서 배달 이유식을 시키고 있다.


나이가 드니 자연스럽게 내 한계를 인정하게 된 것 같다. 따라주지 않는 몸뚱이와 바뀌지 않는 허술한 성격을 채근하는 삶이 얼마나 피곤한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때에 아이를 낳은 것이 운이 좋았다. 그냥 흘러가게 두어도 걱정만큼 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며 살고 있다. 처음에는 훈기가 분유를 너무 많이 먹어 걱정이었지만 그만큼 빨리 자라는 아이가 되었고,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아 걱정이었지만 그만큼 늦게 일어나니 아침 시간이 여유롭다. 초음파 사진은 시기별 감동 멘트와 함께 정리하기는 이미 글렀으니 훈기가 조금 컸을 때 같이 이야기 나누며 정리해 보면 재밌을 것 같다. 뭐, 건조기는 어차피 일감을 줄이기 위해 구입한 것이었으니 용도에 맞게 사용하면 되고, 도서관에 자주 데리고 다니면 책이랑도 자연스럽게 친해지겠지. 이유식을 전부 만들어 먹이지 못한다고 마음을 무겁게 가지기보다 이유식을 사 먹일 수 있는 여력이 있음에 감사하면 된다.


그래도 가끔은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몰라 초조하거나 불안한 마음이 든다. 그럴 때는 이런 생각들을 한다. 많은 것들이 생각보다 괜찮다. 걱정만큼 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일어난다면, 그때 가서 잘 해결하면 된다. 내 삶의 리듬에 맞춰 아이를 기른다. 조바심 내지 않는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다. 남들 하는 것 다 하지 않아도 된다. 결과를 위해 과정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는다. 지치지 않아야 한다. 죄책감 갖지 않아도 된다.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놓지 않는다.


고맙게도 훈기는 잘 웃는 아이로 자라고 있다. 훈기가 웃으면 나도 행복하므로, 아이를 웃게 하는 일이 당장 내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이다. 훈기를 웃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내가 먼저 큰 소리로 깔깔대며 웃는 것.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자 일단 이렇게 마주 보고 웃으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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