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찾아가는 길’에 들어선 사람을
구도자(求道者, 구할 구, 길 도, 놈 자)라 부른다.
요즘 글쓰기 모임에서 자주 다루는 글의 주제가 있다. 바로 '나를 찾아가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경험하는 이야기들이다. 모임에서는 2시간 동안 각자 쓴 글을 읽고,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내 글에 대한 반응은 늘 두 갈래로 나뉜다. 도움이 되었다는 사람과, 어렵다는 사람. 어느 날, 글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한 모임원이 물었다.
“왜 이렇게 어려운 글을 쓰세요?”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대답했다.
“제 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저도 예전에 다른 작가의 경험이 담긴 글을 읽고 큰 도움을 받았거든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처럼, 쉽지 않지만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담은 글을 쓰고 싶어요.”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주제였기에 대답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질문은 모임이 끝난 후에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왜 이런 글을 쓰는지, 왜 쓸 수밖에 없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의 질문이 남긴 여운은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질문에 떠오른 답변 몇 가지를 글로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그 글들을 다시 읽으며 무엇이 빠져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쓴 글 대부분은 ‘왜 이런 글을 계속 써야 하는가’라는 목표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는 비슷한 주제를 반복적으로 글로 쏟아내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회의감이 밀려왔다.
‘돈도 안 되는 글, 쓸모도 없는 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고 계속 쓰고 있는 걸까?’
이러한 회의감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내가 쓰고 있는 글 속에서 분명한 의미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은 의미는 ‘타인을 향한 사랑’이었다. 나를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그것.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인간 내면의 갈등과 혼돈을 잠재울 열쇠 같은 것. 인간의 고통을 잠재우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겨 줄 수 있는 길. 내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앎’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의 질문에 진짜로 답해야 했던 것은 목표가 아니라 계기였던 것 같다. 질문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가 정작 필요로 했던 이야기는 내가 왜 자신을 찾아가는 길에 들어섰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으리라. 나에게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그러나 나의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바로 그 이야기.
'나는 왜 구도자가 되었는가.'
나는 잘 살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 좋은 직업을 갖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부모님의 직업, 친구들의 직업, 직장 동료, 선생님, 자영업자, 공무원 사업가, 프리랜서 등등. 그런데 잘 살기 위해 노력해서 직업을 얻은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마치 간장에 절여지듯 걱정과 근심에 찌든 얼굴들. 영혼을 잃은 좀비가 가득한 세상에서 밝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기 어려운 것처럼. 내가 본 세상은 그러했다. 나 역시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품기 힘들었다. 주변의 모습들이 나를 짓눌렀고, 그것은 곧 나의 현실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 성적표는 ‘양가집 규수’라는 농담처럼 ‘양’과 ‘가’로 채워져 있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하는 말은 내게 외계어처럼 들렸고, 무슨 뜻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수업은 지루했고, 학교생활은 재미없었다. 나는 하루빨리 그 시간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 3년은 그저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었고, 실제로 나는 근근이 버텼다. ‘학생은 공부가 본분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나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유를 모르니 공부는 어렵고, 잘할 수도 없었다. 해도 안 되는 공부를 잘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느껴졌다.
졸업 후, 출판사 제작부서에 입사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학교에서 그렇게 하기 싫었던 공부가 생존 앞에서는 달리 보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실전에서 배우는 지식은 실생활과 맞닿아 있었고, 이론을 배우고 활용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출판 제작 분야의 학문적 깊이는 만만치 않았지만, 배움의 과정은 오히려 몰입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나는 매일 새로운 지식을 익히고, 성장하는 자신을 느끼며 도파민이 솟구치는 경험을 했다. 이 배움은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일을 배우며 느끼는 기쁨과 성취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이었다. 나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내 인생은 꽃길만 펼쳐질 거야.’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확신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직장 생활 2년이 지날 즈음 맡고 있는 업무와 인간관계가 익숙해졌다. 그와 동시에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삶이 너무나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느껴졌다. 내 머릿속은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들로 가득 찼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삶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삶 인가.’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도대체 왜 이토록 고통이 반복되는 삶을 영위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버텨내고 있었다. 버텨내는 것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고등학교 3년의 지겨운 시간을 억지스럽게 근근이 그저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버텨냈듯 그저 버텨내는 것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암울했다. 이제 끝난 줄 알았던 지루하고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시간을 또 버텨내야 한다니. 고등학교 때는 3년이라는 데드라인이라도 있었지만, 이제 나는 성인이고 직장인이다. 지금 이 고통에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쭉 끝이 보이지 않는 무의미한 시간을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또다시 지루하고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반복해야 하다니.
이젠 지쳤다.
더 이상 이 생활을 반복할 자신이 없다.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이렇게 살기 싫을 뿐이다.
그러니...
누가 나에게 알려 줬으면 좋겠다.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이 지루하고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러니 제발...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때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인생은 무척 행복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와 대화를 통해 알 게 된 것은 있는 것이 나에게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고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았다. 먹는 음식에 감사했고, 만나는 인연에 감사했고, 만남이 가능한 시간에 감사했다. 건강한 육신에 감사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음에 감사했다. 그는 모든 일에 충실하게 살아가되 결과는 신에게 내 맡기는 삶을 살고 있었다. 설령 그 결과가 고통스러울지라도 흔쾌히 결과를 수용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얘기하는 ‘믿음’이란 것이 참 강인하고, 멋있어 보였다. 나도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긍정적인 사고를 하며,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인생에서 장애물을 만났을 때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품고 살아가고 싶었다. 드라마 이태원 클래스 OST ‘돌덩이’의 가사처럼 말이다.
그저 정한 대로 따르라고, 그게 현명하게 사는 거라고, 쥐 죽은 듯이 살라는 말! 같잖은 말! 누굴 위한 삶인가! 뜨겁게 지져봐. 절대 꼼짝 않고 나는 버텨낼 테니까! 거세게 때려봐. 네 손만 다칠 테니까. 나를 봐! 끄떡없어. 쓰러지고 떨어져도 다시 일어나 오를 뿐이야. 난 말이야. 똑똑히 봐! 깎일수록 깨질수록 더욱 세지고 강해지는 돌덩이.
“믿음이 뭔가요?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나요?”
그가 뿜어내는 삶을 대하는 매력적인 태도에 이끌려 그에게 물었다.
“신의 의도가 그러하니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야.”
신이 보시기에 누군가에게 고통이나 고난이 필요한 때라고 여겨지면, 그러한 신의 의도가 현실에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신의 의도로 인해 어떤 결과를 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신이 내려 주신 현재의 고통 속에서 신의 의도를 기다릴 뿐이라고, 신이 자신에게 주시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고통과 고난 속에서 그저 믿고 기다리면 언젠가 그 결과를 현실로 보여주시거나 신의 음성으로 들려주시기에 믿지 않을 수 없다고 말이다.
그 당시의 나는 ‘신은 없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신은 죽었다.’고 말이다. 그런 나에게 ‘신’에 대한 내용은 유토피아, 파라다이스, 천국, 유니콘, 인어, 피터팬, 팅커벨처럼 환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삶이 부러웠지만, 나와 결이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삶을 내가 따라갈 수는 없었다.
나는 지랄 맞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억압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데, 오죽하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참고 하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공황발작 증상 일어나겠는가.
기독교로 나를 교화시키려는 사람들의 성향은 ‘무조건 믿어라. 무조건 교회로 와라’는 식이었다. 교회에 나갈 의지도 의향도 없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무조건 하라’는 식의 강요 섞인 권유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 거기다 종교라는 것 자체를 더욱 혐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했다.
기독교인들을 혐오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 즈음 나의 혼을 쏙 잡아 끄는 사람이 있었다. 그 역시 행복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는 높은 지혜를 가지고 있었고, 미래를 보는 해안이 있었으며,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여기. 현재를 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괴로운 이유는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불안을 끌어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통과 괴로움의 모든 원인은 알지 못하고, 잘못 알고 있는 ‘무지’때문이니, 어서 빨리 무지에서 깨어나라고 말했다.
그는 ‘무조건 믿어라.’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나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또 그 사람처럼 살아가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그는 문제가 있을 때 회피하지 않고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늘 오묘했다. 그의 표정에서는 짜증이나 근심, 걱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은 늘 여유가 있었고, 한 없이 넓고 한 없이 깊은 바다와 같았다. 넓고 깊은 바닷속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빠르지 않지만, 망설임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급하지 않지만, 강인하고, 여유롭고 지혜롭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늘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지인의 소개로 강연에 참여했을 당시의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그곳에서 또 나의 혼을 쏙 빼놓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해당 강연의 강연자였다. 그는 강연에 참석한 한 청자와 단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그 청자의 과거와 현재의 삶이 어떠한 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실제 내 앞에서 벌어지는 그 광경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이롭고 신비로웠다.
도대체 저 강연자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길래, 저리도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인 지 알고 싶었다. 저 강연자에게는 있고, 나에게는 없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리도 다른 세상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나 역시 저 강연자처럼 한 번 딱! 보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미하지만 막연한 꿈과 희망을 품었다.
“당신은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능력이 있었나요?”
강연에 참석한 청자 중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저 역시 여기 계신 여러분과 같은 자리에서 시작했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강연에 참석했고, 여러분처럼 배움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다른 점이 있다면 시작 시기가 다를 뿐입니다. 저는 10년 전에 강연을 들었고, 그때부터 지속적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강연자는 지금 당장은 어려울 수 있지만, 노력해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강연에서 나도 가능하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세 사람을 통해 내가 알 수 있었던 공통점은 한 가지뿐이었다.
'나도 저들처럼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는 것.'
돌덩이 같은 강인한 삶을 살고 싶었다. 감당할 수 없게 박찬 이 세상에서, 유독 내게만 더 모진 이 세상에서 쓰러지고 떨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깎일수록 깨질수록 더욱 세지고 강해지는 돌덩이 같은 삶. 누가 뭐라 해도 나의 길을 가는 사람, 오직 하나뿐인 나의 길을 가는 사람. 내 전부를 내걸고서 계속 걸어가는 사람. 부딪히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걷는 사람. 틀려도 괜찮은 사람. 당당히 ‘이 삶은 내가 사니까’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가슴속에 뜨거운 열정을 품고, 불꽃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불태우는 그런 삶. 이 한 생명 불꽃처럼 화려하게 아낌없이 남김없이 불태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내 가슴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강인한 돌덩이는커녕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나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일쑤다. 동일한 문제를 두고, 이것이 맞다. 저것이 맞다. 또는 이것이 틀리다, 저것이 틀리다. 도대체 무엇이 맞다는 말인가. 명확한 기준도 없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세상. 모든 것이 모순 덩어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내가 만난 이들은 사유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났다.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내 가슴속에 풀리지 않는,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맴돌았고, 그 의문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시간과 정성을 들여 풀어내고자 한 발짝 내디뎠다. 그곳에는 나 보다 먼저 이러한 문제들을 고민한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에서는 그들을 사상가 또는 철학가 등으로 불렀다. 삶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고민하고 해결하는 사람들을 현자 또는 성인이라 부르고 있는 세상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
나 자신을 바로 세우는 방법을 모두 알고 난 후
편하게 걷는 길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 즉 나의 목표는 행복하게,
나답게 잘 사는 것이 이고,
목표가 나를 끌어 당기 듯 들어선 길이
‘자아를 바로 세우는 길’이었을 뿐이다.
자아를 바로 세우는 길을 걷는 이를 사람들을...
세상에서 ‘구도자(求道者)’라 부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