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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집 Jul 31. 2019

수탉

수탉


수탉이 철조망 틈새 끼인 날갯죽지를 빼느라 발버둥을 친다. 눈망울을 껌뻑이고 붉은 볏을 움찔거리는 모습이 힘겨운가 보다. 틈새가 비좁아 수탉이 탈출하기엔 불가능해 보이건만, 포기할 수 없다는 몸부림이다. 탈출을 향한 집념이 팔월의 태양 볕보다 뜨겁다. 급기야 부리로 땅을 쪼아대며 용을 쓴다. 수탉의 몸짓에서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오기마저 느껴진다. 드디어 탈출이다. 수탉이 날개를 펴고 텃밭으로 쏜살같이 내달린다. 철조망 아래 땅을 파헤쳐 틈새로 탈출을 성공한 것이다. 닭이 머리가 나쁘다는 말도 옛말인 것 같다. 철망과 땅의 틈새를 파헤치면 구멍이 생기는 걸 어찌 알았을까. 수탉은 볏을 꼿꼿이 세우고 개선장군처럼 풀밭을 활보하고 있다. 그 모습은 더없이 늠름하다. 수탉의 탈출은 한 번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얻은 값진 성공이다. 수탉을 바라보다 문득 예전 내 모습이 떠오른다. 과연 나는 삶의 주인인 적이 있었던가. 돌아보니 목숨 줄인 생업을 쫓느라 종종거리며 살아온 듯싶다. 좀 더 넓은 집을 얻고자 애를 쓴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비싼 자동차와 좋은 옷을 입고자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낯선 세계의 도전은 고사하고, 세 목숨 부지하고자 일을 찾아 애가 탈 뿐이었다. 두 딸의 손을 잡고 마주한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누구에게도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때론 오기도 부렸다. 매순간 강해지고자 마음을 다잡았고, 그래도 두려움이 일면 들길을 달려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스스로 생계란 목숨줄에 친친 감겨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았다. 나에게 수탉의 거침없는 도전이 절실하던 터였다. 생명 앞에선 미물인 닭도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알을 품은 어미 닭은 모이를 먹을 때 외엔 둥지를 떠나지 않는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알을 품은 채로 잠이 든다. 새끼 외에 그 어떤 것도 욕심내지 않는다. 오직 알이 깨어 병아리가 되기를 염원할 뿐이다. 나 또한, 아이들을 온전히 지키고자 개인의 삶은 세상 밖으로 내던졌다. 어설픈 감상이나 불평불만을 할 여유도 없었고, 한낱 감정 타령은 사치라고 여겼다. 가장의 빈자리와 세 명의 목숨을 위하여 옥석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지난한 환경이 홀로 두 아이를 키우기에 역부족이었지만, 아비의 역할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행히 두 딸은 부족한 보살핌에도 밝은 모습으로 자랐다. 새벽일을 마치고 돌아와 서둘러 아침을 준비하였다. 아이들에게 부족한 사랑을 아침밥으로 대신이라도 할 양 바지런을 떨었다. 그렇게 다시 일터로 부리나케 향하던 참이었다. 먼지가 뽀얀 자동차 유리창에 언뜻 무언가 보였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가로등 불빛에 보이는 것은 ‘엄마 사랑해!’라고 또박또박 써놓은 문자였다. 작은 녀석의 필체였다. 평소 표현이 적어 ‘시크소녀’라고 부르는 녀석에게 사랑 고백을 받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아마도 학교를 마치고 오던 길에 적어놓았으리라. 병아리만 같았던 딸아이가 벌써 부모를 위로해 줄 정도로 성장한 것 같아 기특하였다. 딸의 무언의 표현은 천근같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새벽길을 달려도 지치지 않을 활력소가 되었다.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큰 딸이 둥지를 떠나던 날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안정된 직장을 마다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겠단다. 처음엔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경쟁이 치열한 광고계에 뛰어든 아이가 불안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아이가 대학 시절 내내 몰입하던 분야였기 때문이다. 딸은 내로라하는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고 외국 연수도 다녀왔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접고 직장을 택한 건 엄마와 동생을 염려한 결과였으리라. 딸은 대입시험 준비도 홀로 무진 애를 썼다. 엄마의 경제적 짐을 덜어주고자 학원도 가지 않던 녀석이었다. 수능시험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독서실에 가고 싶다고 말하였다. 최선의 노력을 한 다음에야 다른 대안을 찾는 아이인지라 이번 일도 쉬이 결정하진 않았으리라. 그렇게 딸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내 눈에 사회자로 선 딸의 모습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연말 회사에서 주관하는 소외된 이웃을 위한 자선경매 자리였다. 큰 무대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자리를 굳히는 딸이 기특하였다. 아비의 부재와 어미의 나약함에 큰아이는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였나 보다. 막막한 현실을 탈출하고픈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으리라. 그 덕분인가, 자신의 미래를 지키고자 도전하는 발길에 거침이 없었다. 과연 엄마보다 용기가 넘쳤다. 딸의 모습은 좌중을 이끌고 있었다. 그날 자선행사가 대성황이었다며 보내온 영상에는 마치 수탉이 풀밭을 누리듯 활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행사를 준비하고자 녀석은 많은 시간 무던히 애를 썼으리라. 딸의 당찬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삶이 고단하다고 절망하지 않아 고맙다. 단단한 세상의 철조망을 뚫고자 도전을 포기하지 않아 고맙다.’라고 딸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아이는 이제 걱정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듯 화면 가득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머문 세상을 돌아본다. 나는 한 동안 세상 속 두려움이란 감옥에 자신을 유폐시킨 듯싶다. 두려움은 실상 그 높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차마 그 깊이를 바라보지 못하고 지레짐작 느끼는 공포감이리라. 수탉의 탈출과 딸의 거침없는 모습이 나를 일깨운다. 이제 딸들에게 진정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마음 깊이 숨죽인 모든 감각과 의지를 일깨우리라. 꿈을 마음껏 펼쳐 보고픈 강한 의욕이 불붙듯 일어난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수탉의 자태가 늠름하다. 먹이를 사냥하고자 흙을 헤집는 발길질에도 힘이 넘친다. 울안에만 머물렀다면, 흙 속 산해진미와 새싹의 향긋함을 어찌 맛보았겠는가. 비록 수탉의 일생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나 삶을 선택할 권리는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 불굴의 도전이 있었기에 울안이 아닌 풀밭의 터전을 얻은 셈이다. 용기도 절망도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삶에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어디 있으랴. 고통의 원인은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러니 극복하는 일 또한, 스스로 감당해야만 한다. 모난 돌이 몽돌이 되기까지는 거친 물길에 쓸리고 부딪히는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야 한다. 머물러 주춤거린다면 무엇 하나 얻을 수 없으리라. 수탉의 몸부림에서 포기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거침없는 도전정신을 깨우친다. 세상은 두려움이 아닌 도전의 장이다. 웅덩이에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끝없이 물길을 다독여 강으로 바다로 주저 없이 나아가야만 한다. 저기 붉은 볏을 꼿꼿이 세운 수탉이 걸어오고 있다. 마치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딸들이 부모에게 걸어오는 모습만 같다. 이제 딸들에게 나의 참모습을 보여 줄 차례이다. 가슴에 품은 꿈을 향하여 신발 끈을 단단히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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