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끝도 없이 펼쳐진 네게브 사막에서 염소와 낙타를 키우며 700년 동안 살고 있는 베두인들이 있다. 그들이 삶은 내밀한 공간과는 거리가 먼 길 위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우리들의 시간은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연 평균 강수량이 우리나라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은 사막의 삶터인 백두인들, 그들은 70미터가 넘은 땅속에서 지신의 전부건 나무처럼 살아간다.
먼지 가득한 사막 한 가운데서 푸른 잎을 틔우는 그들 삶 모두가 신비에 가깝다. 오래전부터 낙타와 함께 향료를 싣고 사막 길을 걷고 왔던 사람들, 그들은 그렇게 삶의 무게를 등에 친 채 길 위에서 살아간다.
국어교과서에 코를 박고우리들에게서 창밖 너머로 시선을 옮긴 선생님은 가끔 자작시를 읽고 했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10년은 더 젊었을 선생님은 그렇게 자신의 삶을 어두운 시대를 은유로 고백했다.
창문틈사이로 들어오는 매캐한 최루탄냄새는 일종의 공포였다.
우리들은 무거운 시대를 통해 분노 보다는 의문과 불안을 직감적 터득했다. 일그러진 현실로 어수 한 그때. 바람에 흔들거리는 플라타너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멈춘 선생님의 눈빛, 그 깊은 눈빛에서 나는 사막을 보았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얼마 전 허리수술을 하고 재활치료가 길어지는 있는 선생님을 뵈러 갔다. 불쑥 병실을 찾은 나에게 손을 내미셨다. 처음으로 보는 쓸쓸함이었다. “의사가 내가 불안증이 있대, 내가 너무 예민해서……” 늘 장수 같았던 선생님의 약해진 모습은 내게 낮 설었다.여기저기 흩어진 원고청탁서와 메모들 때문인지 어수선한 병실은 선생님의 복잡한 마음그대로였다.
병실 한 구석에 놓여 있는 휠체어는 선생님의 발이 되어 주었다. 병실 문을 나서는 내내 나는 많은 생각을 들었다. 교직을 퇴임한 후 지금가지 한시도 쉬지 않고 시를 쓰고 강의하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온 선생님은 불안하고 있다. 그 불안의 근원이 무엇일까?
단 하번도 길 위에서 멈춰 본적이 없는 이가 겪어야만 하는 불안이란 어떤 무게일까, 선생님의 어두운 얼굴에 번지던 그늘은 사막의 고요를 닮았다. 병실 문을 나서는 내 앞에 조각난 겨울햇살이 아롱 거렸다.
이베리아반도에서 두 달 반을 걸어야 낙 등에 실은 향료를 지중해로 가는 배에 옮길 수 있었던 고대 이슬람 상인들, 그들에게 사막은 온몸으로 정직하게 걸어야 도달 할 수 있는 죽음과 삶의 함께한 길이다.
우리가 가고 있거나 가야 할 길 또한 수많은 필연과 우연의 이루어지는 길, 그래서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곳이다. 모든 것은 길 위에서 시작되어 길 위에서 끝나는 것일 수도 …… .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이 어느 날 문득 겪게 될 표, 그것은 누구에게나 불안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위안일 수 있다.
삶이란 내밀한 세계의 집 속에서 수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길의 또 다른 이름 일 수 있다.그래서 주어진 생의 길을 온 힘을 다해 걷게 만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고요한 시간 속에 갇혀 버린 선생님처럼 누구나 가야할 길이 사라진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사막의 나무도 결국은 생을 다해 내렸던 뿌리를 스스로 거두는 시간을 맞이한다. 그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길이 주는 깨달음이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끝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그런 d;유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낡은 세계는 때론 새로운 세계란 알을 품게 된다. 하지만 껍질을 깨는 고통 없이 또한 다른 세계를 열 수 없다. 끝없는 사막을 걸어야 했던 아랍상인들에게 길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동방의 향신료에 매료된 유럽인들이 각종 향신료를 탐하던 탐욕의 시대, 과연 그 길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 질 것인가,
삶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쉼 없는 노고를 기꺼이 받아들일 때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잠시 멈춰 있는 동안, 그 순간마저도 사막에서는 살아 있는 꽃으로 핀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길의 세계, 그 속에서 낙타의 슬픈 눈과 마주 친다. 어쩌면 그것은 사막을 건너는 우리들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저마다 주어진 길을 우리는 타박타박 걷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