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셋째 주 일요일. 우리는 다 같이 개그콘서트를 보고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도 평온하고 행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
내용을 들을 순 없었지만 수화기 너머 무거운 기운만은 느낄 수 있었다. 통화를 마친 엄마는 천천히 우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표정은 보지 못했으나,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있었던 것 같다.
"애들아. 아빠 죽었대."
큰언니는 외마디 비명 후 울부짖었다. 작은 언니도 눈이 땡그래지더니 크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멀뚱히 엄마와 언니들을 바라보았다. 슬퍼하는 엄마와 언니들을 보자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아빠 장례식장에 가서 너무 울면 안 된다고 밀했다. 언니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 역시 엄마 품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았다.
빈소는 서울에 있었다. 1시간 반이나 가야 했다. 가는 동안 엄마한테 아빠는 왜 죽었냐고 물어봤지만, 엄마는 정면만 응시한 채 크면 말해준다고 했다. 큰 언니는 눈을 흘기며 '좀 가만히 있어'라고 하는 듯했다.
장례식장 입구엔 큰 외숙모가 와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외숙모께 반갑게 인사했지만 외숙모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외숙모는 뛰어다니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다가 11살짜리가 뭘 알겠냐며 시선을 돌렸다.
인사를 전하는 엄마에게 큰 외숙모는 우리 세 자매도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냐고 물어봤다. 큰언니만 알고 작은언니랑 나는 모른다는 엄마의 대답을 듣곤 외숙모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항상 억세고 다부진 큰 외숙모조차 울기 직전의 얼굴이었고, 엄마의 눈엔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큰언니는 그런 엄마를 껴안아 주었다.
처음 느낀 분위기에 압도되어 차마 엄마 옆에 다가가지 못했다. 무서워서 옆에 있는 2살 터울 작은언니의 손을 꼬옥 잡고 있을 뿐이었다.
외숙모는 안에서 너무 슬퍼하거나 멀쩡하면 사람들이 욕한다고 말해줬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끄덕였다. 엄마가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말했을 땐 너무 슬퍼하지도, 멀쩡하지도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빠가 있는 일반실 103호에는 고모와 큰엄마가 있었다. 고모를 보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고모는 성큼 내게 다가와 내 손을 만지며 "네 아빠가 널 제일 예뻐했는데"라고 말했다.
고모는 "봐라, 네 아빠다" 라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빠의 커다란 흑백 사진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경기를 일으키며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절했다.
눈을 떠보니 사촌 오빠와 엄마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때서야 너무 슬퍼하지 않기로 한 약속이 생각났다. 약속을 못 지켰다는 생각에 미안해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술 취한 사람들은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떻게 발견됐는지에 대해 떠들었다. 엄마가 들려주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그들은 아빠의 죽음에 대한 애도보다 우리가 도망친 이야기와 아빠가 죽은 방법에 흥미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화투 치던 사람이 '쓰리고!'라고 외쳤고, 그 신호에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는 죽었는데 멀쩡하게 놀고 있는 사람들이 미웠다. 엄마는 다가와 말없이 껴안아 주었다
엄마한테 아빠 유서 내용을 묻자, 옆에 있던 큰언니는 읽을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엄마도 커서 보라고. 근데 되도록이면 보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그날 이후 엄마한테 유서를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다. 밤에 엄마 몰래 가방을 뒤져 아빠의 유서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빠의 유서는 빨간펜으로 적혀있었다.
'나는 ○○○ 때문에 죽는다. 애들 데리고 도망친 나쁜 씨발년. 씨발. 죽어라. 개 같은 년아. 때렸다고 도망을 쳐? 나는 때렸지만 너는 날 죽이는 거야. 폭행보다 살인이 더 큰 죄인 거 알지? 살인마 년아. 평생 저주할 거다. 지 언니를 부추겨서 도망치라고 해? 너네는 이모를 평생 용서하지 말아라.'
이것이 아빠 유서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아빠의 3장짜리 유서는 엄마와 이모를 향한 저주였다.
자살 유가족은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또는 '이렇게 해줬더라면' 고인이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으로 괴로워하다 따라 죽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아빠의 저주까지 받은 우리는 아빠의 죽음 후 한동안 우울의 늪에서 살았다. 특히 둘째 언니랑 나는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꽤 오래 죽음을 생각했다
'아빠가 자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 움츠러들었고, 이따금씩 우울감이 몰려오는 시기가 되면 나의 죄로 더욱 괴로워했다. 셋째 딸로 태어난 죄. 아빠가 제일 예뻐했음에도 떠난 죄. 아빠를 죽도록 방치한 죄. 아빠는 살아서는 폭력으로, 죽어서는 자살 충동으로 계속해서 괴롭혔다.
사람들은 아빠가 자살했다고 하면 "왜? 약 먹고? 진작에 정신건강의학과를 같이 가보지."라는 도 넘은 호기심과 충고를 보냈다. 또한 '결혼을 하기 전 집안을 봐야 한다'는 통념과 전문가의 '자살은 유전이다' '가족 중 누군가 자살하면 자살할 확률이 높다'라는 연구 결과는 나란 사람은 평생 문제 있는 사람임을 예언하는 듯했다.
그러나 더 이상 사람들과 스스로가 만든 원망과 저주에서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 '어린 시절 역경을 겪은 아이는 자살하기 쉽다'는 타인이 정의한 문장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정의한 삶을 살고자 한다.
아빠가 자살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그동안 너무나도 오래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이제는 아빠가 자살했다는 것에 쓸데없는 죄의식을 가지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아빠는 수많은 사망 원인 중 '자살'했고, '아빠가' 자살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