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비밀이 있다. 나에게는 아빠의 죽음이 그러하다. 이 비밀은 내가 만들기도 했고,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람들의 머릿속 가족이란 아빠, 엄마를 포함한다. 부모가 이혼했거나 돌아가셨거나 또는 다른 어떤 이유에서든 부모와 함께하지 않는 가정은 정상이란 범주에서 배제된다. 그러기에 나는 의도치 않게 사람들을 속여왔다.
사람들은 "너는 아빠가 계셔?"라고 묻지 않는다.
"너네 아빠는 어때?"라고 묻는다. 기본값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어딘가 서글프다.
어릴 때 친구들이 아빠 이야기를 할 때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콕 집어 물어보면 아빠가 살아있을 때 기억을 떠올려 대답하곤 했다.
"너네 아빠는 잘 놀아줘?"라는 질문에 "아빠는 나랑 자주 놀아주지 못했어"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아무도 '살아 있는' 아빠는 어떠냐고 묻지 않았으니 '살아 있던' 아빠를 기억하며 답하는 것이다.
내 나름대로는 거짓말을 하지도, 사실을 밝히지도 않기 위해 과거 시제를 사용했다. 과거형으로 대답하면서 내심 비밀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오길,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과거형을 쓴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아빠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었으니까.
친구들은 우리 아빠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었을 텐데, 쓸 데 없이 '나는 야비한 거짓말쟁이야'라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거짓말이 들통날 때를 대비해 "난 그때 과거형으로 대답했어. 난 거짓'말'을 한 건 아니야."라고 머릿속으로 변론도 해보았다. 정말 쓸 데 없이.
어느 날 말로 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끔 만드는 것 역시 거짓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에 홀로 울며 회개 기도를 했다. 더 이상 친한 친구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라는 생각에 며칠을 고민하다가 친한 친구 몇명을 불렀다.
비장한 마음으로 '사실 아빠 돌아가셨어'라고 말하자 친구는 '정말? 어쩌다? 왜?'라고 물어봤다. 몇 년간 죄의식으로 괴로워하고, 변론까지 준비했는데, 돌아온 답변이 '왜?'라니. 왜.
원망도, 질책도, 위로도 아닌 훅하고 들어온 기습 질문에 정말로 거짓'말'을 했다. "사고로" 자살 유가족이라는 것을 밝히면 안 될 것만 같다는 내면의 의식이 나를 거짓으로 이끌었다.
친구는 무슨 사고였냐고 물었고 "교통사고"라고 또다시 거짓말을 했다. 우리 아빠의 죽음에 대한 취조를 마친 친구는 그제야 "힘들었겠다."라고 위로했다.
그 이후 거짓말은 익숙해졌다. 한 번은 친해진 친구에게 "우리 아빠는 돌아가셨어"라고 고백했는데 친구는 아빠의 사망원인뿐 아니라 교통사고 보상금은 받았는지도 물어봤다.
당황해서 "뺑소니 사고라서 그런 거 없었어."라고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했는데, 친구는 보험금을 받았는지와 가해자는 잡혔는지도 궁금해했다.
아빠의 죽음에 대한 미스 리플리의 처세술은 남편과 결혼 준비할 때 정점을 찍었다.
시댁에서는 새로운 가족이 되는 내게 아빠가 돌아가신 이유를 조심스레 물어보셨고 나는 많은 고민을 한 뒤 교통사고라고 답변을 했다.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자살한 사람의 딸이란 이유로 파혼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앞으로 함께할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며칠 후 필름이 끊길 수준으로 혼자 진탕 술을 마셨다. 그리고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1시간 동안 울분을 토했다.
"아빠는 술 마시고 운전하다 사람을 죽인 가해자니까 아무도 아빠의 죽음에 대해서 묻지 말라고!!"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나서 유일하게 기억나는 말이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한 상태에서 아빠의 사망원인에 대해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그리고 그 말만 기억하다니. 나 자신이 소름 끼쳤다.
뇌가 술에 쩌든 와중에도 아빠가 자살했다는 사실보다 술 마시고 운전하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는 거짓이 낫다고 판단했나보다.
아무래도 자살은 유가족에게 원인이나 영향이 있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망은 유가족과는 무관한 고인만의 일이니까. 아빠를 음주 운전을 해서 살인한 사람으로 만들어서라도 자유롭고 싶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남편과 시댁에 아빠 죽음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번 거짓말 함으로써 미래에 추가적인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남편과 시댁에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미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을 그들에게 불필요한 편견을 새로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돌아온 것이 호기심이 아니라 "그렇구나"라는 인정과 "많이 힘들었겠다"라는 위로였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나는 리플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아빠의 죽음을 초연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지금도 아빠의 자살에 대해서 만큼은 초연하지 못하다. 그래서 누군가 아빠의 사망 원인을 물어보면 '교통사고'라고 답한다.
언젠가는 누구한테든 거리낌 없이 아빠의 자살을 이야기할 수 있고,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도 편견 없이 바라봐 주는 날이 오기를 바라 본다.